즐거운 여름방학이 시작되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인 딸아이에게 근사한 경험을 선물하고 싶어 남편과 머리를 맞댑니다. 우선 딸아이가 환호하는 워터파크 일정을 잡고, 2박 3일 부산 해운대휴가계획을 짰습니다. 아이가 열망했던 로봇과학 방과후 수업을 신청하고, 피아노 학원과 태권도 시간을 조정했습니다.
저는 불빛도 감별할 수 없는 시각장애 1급 여성입니다. 특수교사로 16년째 일하고 있고, 여덟 살 딸아이를 하나 키우는 워킹맘이기도 합니다. 남편은 신체 건강한 회사원입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못말리는 딸바보 아빠지요. 저희 부부는 '천리안'이라는 PC통신망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깃털같이 가벼운 인연은 기적처럼 우리의 오늘을 있게 했습니다.
저는 녹내장이라는 안질환으로 두 눈을 실명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시도해볼 수 있는 의료적·비의료적 처치는 다 받아 보았지만, 결과는 무색했습니다. 부모님의 현명한 선택 덕분에 저는 중학교 과정부터 특수교육을 받았습니다. 여느 또래 친구들처럼 스무 살 때 대학에 입학했고, 24살 때 취업을 했습니다.
모뎀을 이용한 PC통신이 성행하던 대학 시절, 우연히 책을 좋아한다는 한 남자를 알게 되었고, 책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저는 선뜻 그 남자와 메일을 교환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었던 우리의 관계는 점점 깊어졌고, 진지해졌습니다. 2년 정도 메일로만 소통한 다음 처음 전화 통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또 몇 년이 흘러 직접 만났습니다. 그렇게 아주 천천히 우리는 연인이 되었습니다.
메일을 나누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그 남자에게 어렵사리 제가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남자는 많이 놀라면서도 딱히 장애인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지는 않았습니다.
평생 단 한 번도 장애인을 보신 적이 없는 시댁 식구들은 남자의 선택에 경악했고, 반대는 극심했습니다. 고심 끝에 남편은 부모님의 뜻을 거스른 채 제가 있는 지역으로 전출을 감행했습니다.
결혼식은 시댁 식구들의 침통한 눈물과 친정 부모님의 안타까운 눈물, 하객들의 축복의 눈물로 온통 흥건했습니다. 올해로 결혼 11년차가 됩니다. 서먹하기만 했던 시댁 식구들은 그 세월만큼 가까워졌고, 거짓말처럼 돈독한 정을 나눕니다.
멋쟁이 우리 시아버님은 팔순이 되셨지만, 막내 며느리의 학교 홈페이지도 관심있게 살펴 보시고, 종종 메일과 문자를 보내 주십니다. 어머님은 누구보다 먼저 시댁 현관에 들어서는 제 손을 꼭 잡아 주시고, 형님들은 제가 좋아하는 커피며 과일을 챙겨 주십니다. 서울살이를 모두 정리하고 지방으로 내려오신 친정 부모님 덕택에 저는 윤택한 환경에서 육아와 일을 병행합니다. 용감하게 육아 휴직을 했던 남편도 육아와 가사에 달인이 되었습니다.
때로는 두 눈이 먼 제 처지가 원망스럽습니다. 신체 건강한 남자와 장애인 여자가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절벽을 마주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세 식구는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친정 식구들의 남모를 희생과 남편의 헌신적인 사랑에 보답하는 길은 어렵게 꾸린 제 가정을 화목하게 가꾸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각장애인으로 살아가야 할 운명은 제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아내로서, 엄마로서, 딸로서, 며느리로서 저에게 주어진 선택과 책임은 어디까지나 제 몫의 삶입니다.
토요일 오전 시간, 남편이 딸아이를 데리고 영화관에 간 사이 저는 부랴부랴 아침 설거지를 마치고, 청소를 시작합니다. 집안 살림은 거의 친정 어머니가 돌봐 주시지만 주말에는 딸아이 도복을 빨고, 실내화를 빨고, 청소기를 돌리고, 손걸레로 집안 구석구석을 닦습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저는 저 자신을 사랑합니다. 딸아이도 누구보다 건강하고, 밝게 키워내고 싶습니다. 저는 '행복하기'를 선택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라면, 불편한 저라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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