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는 농촌의 상징적인 존재이자 표상이었다. 나는 소에게서 내 고향 농촌을 본다. 우직하고 성실한 근면성, 자연 순리에 묵묵히 따르고, 진인사대천명의 여유롭고, 편안한 모습이어서 언제 보아도 평화롭고 정겹다. 어렸을 때 덜거덕거리며 자갈길 신작로를 달구지를 타고 정읍 5일장에 갔던 일이 새삼스럽게 생생하게 떠오른다.
이제 내 나이 팔순을 바라보는 황혼에 이르러 지난 날의 발자국들을 되돌아보면, 만감에 젖는다. 짧다면 짧은 한 평생이었지만, 80년이란 길다면 긴 사연 많은 인생의 역사가 아니겠는가.
“인생은 한 권의 책이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매일 그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창작하고 있다.”
<파랑새>를 쓴 벨기에의 시인이며, 극작가인 메데르링크(Maeterlinck)는 이렇게 인생을 한 권의 책에 비유했다. 내 인생의 책은 과연 어떤 책으로 엮어져 있을까?
하루하루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쌓이고 쌓여 이루어진 인생이라는 한 권의 책, 그것은 삶을 남이 대신 살아 줄 수 없듯이, 남이 써 줄 수도 없고, 잘 썼건 못 썼건 두 번 쓸 수도 없다. 잘 살았건 못 살았건, 삶이 연습일 수 없듯이, 지우고 다시 쓸 수는 없는 일이다.
우직하게 살아온 세월, 어찌 잘 못 살았던 세월이 없고, 후회하지 않을 세월들 만이랴. 다만 소달구지처럼 덜컹거리며, 걸림돌을 넘고 넘으며 자갈길을 느리지만 뚜벅뚜벅 걸어 왔던 것 같다. 어쩌면 나는 달구지였는지도 모른다. 아니 달구지를 귀감(龜鑑)으로 삼고 살아왔다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소는 항상 우리 곁에서 함께 살았다. 그것은 농경생활에서는 불가분의 관계였기 때문이다. 소는 우직하면서도 겸손하고 신의가 있는 동물이다. 어질고 인자한 픔성을 지닌 동물이다. 다른 어떤 동물보다도 덕성스럽다.
달구지는 소 한 필이 끄는 짐수레이다. 서양의 말이 끄는 마차처럼 화려하거나 멋스러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짐수레이면서 인력거를 대신할 수는 없지만, 항상 시골 어린이나 노인은 물론 서민들이 노래를 부르며 서양의 마차처럼 의기양양하게 타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이 달구지이다.
나는 지금 한 박물관에서 달구지를 바라보고 있다. 저 달구지도 덜커덩거리며, 그 많은 걸림돌들을 넘고 넘으며, 달가닥, 덜거덕, 덜커덕, 덜커덩 달려왔으리라. 옛날의 풍경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춘원 이광수 선생은 그의 수필 '우덕송'에서,
“소! 소는 동물 중에 인도주의자다. 동물 중에 부처요 성자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 마따나 만물이 점점 고등하게 진화되어 가다가 소가 된 것이니, 동물성을 잃어버리고 신성에 달하기 위하여 본받을 선생이다.”
라고 하였다.
이제 기축(己丑)년 소해를 맞이하여, 내 여생이 신성에 달하기 위해서가 아닐지라도, 소를 선생으로 모시고 본받아 자중자애하며 겸손하고, 분수를 알아 만족하며, 유유자적 하고, 달구지처럼 덜커덩거리며, 살아가고 싶다.
(20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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