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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김세명
ㆍ작성일	2009-06-06 (토) 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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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 속의 감나무
내 기억 속의 감나무
전주안골노인복지회관 수필창작반 김세명

텃밭 구석에 감나무 한 그루가 있다. 아주 어린시절 이 집에서 태어날 때 이미 큰 나무였으니 줄잡아 백 년은 넘었 것이다. 지금 내 얼굴 턱의 작은 흉터는 세살 때 이 감나무에서 떨어진 홍시를 줍다가 넘어져 돌 뿌리에 부딪혀서 생긴 것이다.

그뒤 6.25의 참상을 묵묵히 지켜보다 흙담으로 다져진 초가집을 헐어내고 이사를 하게 되어 감나무는 텅 빈 집터에 혼자 서있게 되었다. 나무도 늙어 이제 마치 침침한 병실에서 삶과 죽음을 넘나들며 온몸을 뒤척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나마 경계선으로 남아 있던 흙담이 허물어지면서 텃밭 한 귀퉁이에 선 처지가 되었다. 창을 열면 감나무는 언제나 내 눈에 들어와 무언의 대화를 나누게 된다. 봄부터 여름까지는 초록빛으로 치장하고 넉넉한 마음을 전해 주었고, 가을이면 붉은 빛으로 타올라 눈이 부시도록 풍요를 느끼게 했다. 그러나 하얀 눈이 내릴 때면 야윈 가지들이 바람 부는 대로 휘몰려 언젠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돌려야 했던 소말리아 허기진 아이의 팔뚝처럼 마음을 조인다.

그런데 그 감나무가 죽고 말았다. 물론 탄생은 출발이요. 삶은 과정이며, 죽음은 종착이라는 명적 외길은 거부할 수 없다. 대부분 삶은 축복이요, 죽음은 불행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환자들은 살아야 한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병원을 찾는다. 마찬가지로 삶과 죽음의 명암이 분명한 싱싱한 가지와 죽은 가지를 잘라 주었더니 지난해 아예 통째로 죽어 버렸다.

된서리가 내린 뒤 태양처럼 닮아간 붉은 감을 광주리 가득 담아 왕겨를 섞어 동이에 갈무리하며 긴 겨울밤을 기다리는 재미를 빼앗겼다는 안타까움 때문만이 아니다. 삼경쯤 공부하다 배가 고프면 언 홍시는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미 그것들은 잃어버린 지 오래다. 문명이 앗아갔고 세태가 밟아버렸다.

사막처럼 끝없이 펼쳐진 자갈밭과 거침없이 몰아치는 모래바람을 받으며 살아온 것이 나의 젊은 날이었다. 감나무는 그런 갈증을 풀어 준 물주머니 같은 것이었다. 봄이 오면 감꽃을 주워 꽃목걸이를 만들며 사랑을 그렸고, 연둣빛 감잎이 돋아나면 나도 답답한 일상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했다.

햇빛이 이글거릴 때는 유들유들한 잎새가 하늘을 가리고 높은 가지에 이리저리 동아줄을 얽어 그물처럼 만들고는 그 위에서 자적하게 누워 세상만사를 잊는 여유도 배웠다. 어떤 때는 삶의 무게를 감당치 못해 동쪽으로 뻗은 실한 가지에 목을 매달아버릴까 생각하다가 이내 소스라치게 놀라며 돌아서서 삶과 죽음의 의미를 구분하기도 했다.

이렇듯 감나무는 내 마음의 신상이요, 영혼이요, 꽃이요, 눈물이요, 생성과 소멸이 주렁주렁 엮어진 유혹이다. 이제 그 인연을 거둬간 것이다. 마치 새벽마다 아버지의 산소를 찾아 무릎을 꿇었던 일 년의 세월처럼 두고두고 눈을 돌릴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젠 치우고 그 자리에 새로운 감나무를 심어야 할 것 같다. 먼 훗날 붉은 감이 열릴 때면 나처럼 누군가가 흐드러진 꿈을 꿀 테니까.

이제 내 고향의 어릴 적 정표 하나가 사라져 아쉽지만 다시 그 자리에 감나무를 심어야겠다. 먼 훗날 굵은 감들이 주렁주렁 열리면 빨간 감을 따다가 동이에 담아두고 겨울밤 내 후손들이 홍시를 먹으며 도란도란 내 이야기를 나눌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