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창밖에서 참새들이 재잘댄다. 아침을 차리는 엄마 참새가 가족을 부르는 소리인지 꽤나 시끄럽다. 커튼을 걷어 올리고 문밖을 내다보니 인조골프장 잔디에서 참새가족들이 모이를 찾아 먹느라 꽤나 바쁘다. 어젯밤에 누구네 집에서 곡식을 흘렸나 보다.
0교장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스스럼없이 "선생님, 안녕하세요?"하고 전화를 받는데 언제 곁에 왔는지 남편이 인상을 쓰고 서 있었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주눅이 들었다. 전화가 끝나기가 무섭게 왜 '교장'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고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썼느냐고 나무랐다. 호칭을 더 높여주지는 못할망정 깎아 내려 불러서야 되겠느냐고 나무랐다. '선생'에서 '교장'이 되기까지는 긴~ 세월이 흘러야 하고, 승진을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노력을 해야 얻어지는 호칭인데…. 그걸 모를리 없지만 내가 실수를 한 것 같다. 글동무들에게 스스럼없이 선생님, 선생님이라고 높여 불러주던 호칭을 듣고 서운해 할 사람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한 내 탓이 크다. 상대가 높여 불러준다고 서운해 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니 굳이 변명할 이유도 없다.
요즈음은 어지간한 가계만 하나 있어도 사장님, 사모님이 되는 시대가 아닌가. 옛날의 사장님 이미지는 시골에서는 구경조차 하기 힘든, 큰 기업이나 공장이 있고, 2층 기와집에 금테안경을 끼고, 까만 자가용을 타고 다니며, 집안 살림을 도와주는 식모가 있고, 유모를 두고 아이를 기르며, 뽀얀 얼굴에 파마를 하고, 예쁘게 화장을 한 아내가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사는 집을 사장님집이라 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사장님이란 호칭이 밀물처럼 밀려들어 물결치듯 거리를 휩쓸었다. 호칭을 높여 불러준들 왜 호칭을 높여 불러주느냐고 탓하는 사람이 없고 보면, 호칭을 높여 불러 주어야 상대방의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사실이다.
1980년대 말, 완산구청 환경보호과에 근무할 때, 동사무소에서 근무하는 환경업무 담당직원과 전화를 했다. 나이가 어린 여직원도 동료로 예우를 해서 호칭을 주사라고 불렀다. 젊은이에게 경어를 쓰지 않고 반말을 하면 그도 나에게 반말을 할 때가 생길 수 있고,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 보면 결국 내가 손해를 보게 된다. 나는 반말을 사용하면서 상대방이 경어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탓할 수는 없지 않은가? 어린 것이 반말을 하다니! 하며 누구에게 원망 할 수도 없다. 어떤 이들은 경어를 사용하면 멀어지는 느낌이라며 반말을 사용해도 난 끝까지 경어만을 사용했다. 내가 함부로 취급당하지 않기 위해 방어막을 설치했다고나 할까? 반말을 해야 서로 허물이 없어진다지만 그 걸 쉽게 받아들이지 못 하는 것은 내 성격 탓이다.
따르릉, 따르릉,
"여보세요? 00동사무소지요? 이 주사님 계세요?"
"00동은 맞는데 여기 이 주사라는 사람은 없는데요."
걸걸한 40대 남자의 목소리였다.
"00동에 근무하시는 SJL주사님, 지금 자리에 안계세요?"
"예? SJL이 이 주사님이라고요? 허어 참, SJL이 이 주사님이라네에!"
L양은 갓 공무원시험에 합격하여 00동사무소에 발령된 앳된 아가씨다. 환경업무와 보건업무는 일이 복잡하고 귀찮아서 남자 직원들이 기피하는 업무였다. 그러다 보니 어린 L양이 그 업무를 맡게 되었다. 차분하고 영특한 L양은 성실했다. 그가 한 일은 항상 매끄럽고 깔끔해서 공문 속에 모나리자의 미소를 선물했다. 그때 주요업무는 여직원들에게 돌아가지 않고 남자 직원들이 기피하는 업무만 맡겨졌다. 대개의 여직원들은 민원전화를 주로 받아야 했고, 민원인들은 여직원의 목소리를 사환쯤으로 생각해 반말을 했다. 남자 직원들에게는 어린 사환도 이 주사라고 불러주면서 여직원이 어린 처녀라는 이유만으로 이 주사라는 말이 웃음거리가 되던 시대였다.
호칭을 이 양, 김 양, 박 양이라고 불리는 것이 귀에 거슬리고 싫은 까닭은, 그때에 일 없는 한량들이 자주 드나드는 다방의 레지(register)들을 그렇게 불렀었다. 국어사전의 양이란 말의 뜻은 여자의 성이나 이름 밑에 붙어 처녀라는 뜻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 여사, 김 여사, 박 여사는 결혼한 여자공무원에게 붙여 준 존칭이지만, 시집간 여자나 사회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여자의 존칭을 붙여 부르는 것도 싫었다. 같은 공무원을 부를 때 결혼을 했건 안했건 남자건 여자건 차별을 해서 부른다는 것이 싫었다. 남직원에게는 사무관이 되기 전 공무원 직급 중애서 가장 높은 주사호칭이 붙여진다. 그러나 여직원에게는 공무원의 호칭을 젖혀두고 결혼하지 않은 처녀라는 호칭을 붙여 양이라 부르는 것이 듣기 거북했다. 남자 공무원들 호칭이 결혼에 관계없이 바꿔지지 않듯이 여자 공무원에게도 똑 같이 이 주사라고 했는데 남자직원의 웃음거리가 된 것이다. 성격이 차분하고 얌전한 L양의 얼굴이 떠오른다. 불그레한 뺨에 난처해진 입장을 어떻게 처신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였을 L양에게 우리도 당당하게 우리의 호칭을 찾기 위해 그리 불렀다는 말을 했다. 그 뒤 계속해서 남직원과 같은 호칭을 사용하다보니 호칭에 대해서 이야기가 있었다. 000 씨라고 부르면 좋겠다는 소양교육도 있었다. 여사나 양보다는 000 씨하고 이름을 불러 주는 편이 더 당당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여성상위시대라고 엄살을 떠는 남자들이 생겨난 지금 생각하면 다 부질 없는 짓이었지만, 억눌려 지내던 여직원들은 남자와 평등한 위치에서 평등한 대우를 받고 싶은 갈망을 감출 수가 없었다. 오늘 수화기를 들고 "L 주사님 바꿔주세요." 하면 껄껄 웃는 남자 직원은 없을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수직관계가 아니고, 기차 레일처럼 수평관계로서 영원한 삶의 파트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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