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생각하면 나이가 들어갈수록 어릴 적 어머니의 품속마냥 따스하고 아늑함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 고향은 1965년 농업용수확보와 수력발전소 건설을 위한 다목적댐이 막혀 기름진 문전옥답이 물에 잠기고 함께 살았던 이웃이나 다정한 친구들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어릴 적 다녔던 초등학교도 이전되어 고향을 바라보면 겨울 대추나무처럼 앙상한 모습이어서 늘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다. 고향생각만하면 고향을 반쯤 도둑맞은 심정이다.
내 고향은 전북 임실군 운암면으로 농경시대에는 살기 좋은 곳이었다. 동네마다 큰 내가 앞으로 흐르고 있어 농경지는 수리 안전답으로 비옥하였다. 넓은 들판에는 군데군데 물레방앗간이 있고 동네 뒤로는 산들이 병풍처럼 바람을 막아주어 마을 풍경이 아름답고 평화롭기 그지없는 곳이다.
이렇듯 산세가 좋고 전답이 비옥하니 먹을거리가 풍부하여 인심이 넉넉하고 자식들 교육에도 힘써 훌륭한 인재도 많이 배출한 고장이었다. 나는 운암면 입석리에서 출생하여 6.25때 우리 집이 전소되는 바람에 쌍암리 염재 동네로 네 살 때 이사하여 열여덟 되던 해에 지금의 운암 소재지로 이사했다.
그래서인지 네 살 때부터 열여덟 살까지 살았던 염재 동네에서의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꿈과, 풋풋한 인정, 구수하고 정겨운 사랑방 이야기들이 들려오는 듯하다. 염재에서 살면서 쌓인 아름다운 추억들은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잘 씻겨 지지 않는다.
우리 동네는 100여 호가 채 못 되는 동네로 단합이 잘 되었다. 동네 어귀에는 수백 년 된 정자나무가 30여주 이상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고, 정자나무거리 주변에 둥그런 돌탑이 쌓여 있어 동네어귀에 들어서면 멋진 풍광과 범접할 수 없는 기상이 있는 동네였다. 제일 큰 정자나무 주변은 간혹 촛불이 켜 있었고 나무에 새끼줄이 둘러 처졌던 기억이 난다. 어려운 일이 닥친 집안에서는 정자나무에 공을 들이면 그 어려움이 잘 풀리기도 한 모양이었다.
정자나무 숲에는 아담한 모정이 자리 잡고 있고, 모정 옆에는 크기가 각기 다른 동그란 들 독들이 여러 개 놓여 있어 장정들이 간혹 힘자랑을 하기도 했었다. 널따란 모래씨름장도 있어 여름이면 동네 청소년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하고, 7월 백중날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술과 음식을 나누어먹는 연회장이 되기도 했으며, 동네의 대소사를 논하는 큰 회의장 역할도 하는 곳이었다.
염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서인지 지금도 염재 산골짜기 이름들도 기억이 생생하다. 국-골, 다담-골, 덤박-골, 북시미-골, 사기정-골, 국-골, 양반모-골, 왱이-골, 아홉상여-골, 바람-골, 등 골짜기 이름들도 정겹다. 산골짜기마다 봄이면 나물을 캐고, 여름이면 퇴비에 쓰일 풀을 베고. 가을이면 초도 베고 감이나 밤, 머루나 다래를 따기도 하고, 겨울이면 땔나무를 하느라 골짜기마다 어지간히 누비고 다녔던 아름다운 추억들이 쌓인 곳들이다.
마을 중심부로 실개천이 졸졸 흘러 여름 장마기에는 생활용수로 사용하기도하고, 우리들은 이곳에서 수영의 기초를 다질 만큼 제법 물이 많이 흐르고 가재나 미꾸라지, 붕,어 메기, 같은 물고기들도 서식하고 있어 여름철이면 어린이들이 물놀이를 즐기기에는 충분했다.
지난 초복 날 고향엘 갔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 고향엘 가는 횟수가 줄어들긴 했어도 고향에서 면장으로 정년퇴임한 형님이 지금도 고향을 지키고 있어 간혹 시간이 나면 가기도 하지만 이날은 정겨운 고향 어른들과 친구들을 초청해서 점심을 대접했다.
점심을 먹는 내내 대화는 자연스레 옛날의 고향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옛날 명절이나 칠월백중날 온 동네가 ‘술 먹이 잔치’를 할 때면 어른들이 농악놀이를 하였다. 그때는 TV나 라디오도 없던 시절이고 특별한 볼거리가 없던 시절이어서 농악놀이를 하면 온 동네 남녀노소가 다 모여 화합 한마당 잔치가 되었다.
농악놀이는 동네어른들이나 청년들이 다 참여했고 부녀자들이나 노인, 어린이들이 관객이 되어 온 동네 사람들이 다모였다. 농악놀이는 이정열 어른이 주로 이끌었는데 그 어른의 꽹과리나 장구 치는 솜씨는 과히 인간 문화재급 수준이었다.
설이나 추석 같은 큰 명절에는 신파극도 하고 노래자랑을 하기도 하였다. 정월 대보름이나 추석명절이면 마을 여기저기에 있는 징검다리는 서로 이웃도 모르게 선행하려는 어른들이 놓았다. 이렇듯 우리 동네는 인심이 넉넉하고 문화수준도 꽤나 높았다.
모처럼 고향을 찾아 어른들과 친구들이 한자리에 모여 즐겁게 점심과 함께 마신 술맛은 술 잔마다 정이 철철 넘쳤다. 고향 어른들과 친구들도 모두 즐거워했다. 앞으로 자주 고향에 들러 고향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아야겠다는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고향을 찾는 일은 언제나 즐거운 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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