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엔 은근히 생각나는 게 있다. 뜨끈뜨끈하면서 후루룩 소리를 내며 먹을 수 있는 칼국수다. 재료도 복잡하지 않고 밀가루만 준비하면 된다. 좀 번거롭긴 하지만 영양가로 보아도 좋고, 맛이나 분위기로도 그만이고 재미도 있어 바지락 칼국수를 준비하기로 했다. 가까운 시장에서 바지락 1kg을 사오면 충분하다.
지난해 서울에서 하숙하고 있는 아들이 내려와서 바지락 칼국수를 만들어 먹자고 했을 때 나는 칼국수에 자신이 없고 평소에 하던 대로 나가서 사먹고 들어왔는데 아들은 영 서운해 하는 눈치였다. 엄마가 만들어 주는 음식이 먹고 싶어서였다면서.
어릴 적엔 그토록 외식을 좋아하더니 집 떠나서 하숙생활을 하다 보니 엄마의 손맛이 무척도 그리웠나보다. 그렇지만 나는 바지락 칼국수는 전문가가 더 나을 거라는 편견이 있어 항상 간단한 외식거리로 여겨왔었다.
우리 집엔 밀가루반죽을 늘리기에 안성맞춤인 박달나무 방망이가 주방 한견을 지키고 있다. 올여름 긴 장마에 박달나무 방망이로 반죽을 밀어 때늦은 칼국수 만들기 실습을 많이 해두었다. 아들한테 자신 있게 ‘엄마 표 칼국수’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였다.
칼국수를 만들려면 밀가루 반죽이 중요하다. 반죽을 질지 않게 하여 랩으로 싸놓고, 국물을 준비한다. 즉 육수가 넉넉해야만 칼국수가 칼칼하여 제 맛이 난다. 육수가 끓으면 다시마를 건져내고 굵직하게 채를 썬 면발을 넣고 한 소금 끓이다가 바지락을 넣고, 준비해 둔 애호박과 청량고추를 넣어야 한다. 그러면 알싸한 국물과 쫄깃한 면발이 최상의 맛을 낸다. 뜨거운 칼국수를 먹을 때는 후루룩~ 소리를 내며먹고, 잔치국수를 먹을 때는 쪽~ 입술로 빨아들이면서 먹어야 제 맛이 난다.
어릴 적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홍두깨칼국수가 떠오른다. 어머니는 가끔 일곱 남매의 특별식으로 칼국수를 해주셨다. 칼국수를 미는 홍두깨를 떠올리면 도깨비 방망이가 생각난다.
아버지가 깎아 만든 홍두깨는 배가 약간 나오면서 미끈하게 잘 생긴 도깨비 방망이다. 밀가루반죽을 도깨비 방망이인 홍두깨로 돌돌돌 밀어내면서 한 번 들어 뒤 집으면 딱! 소리가 날 때 우리는 깔깔깔 웃으며 박수를 쳤다.
홍두깨를 든 어머니손이 왔다 갔다 하면 개다리 소반만한 둥그런 반죽이 만들어 지고 그걸 접어 날렵한 손놀림으로 칼국수를 만들어내는 어머니 손은 그야말로 뚝딱! 도깨비 방망이였다. 구수하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칼국수는 어른도 두 그릇 애들도 두 그릇씩 포식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이름난 칼국수집에 가서 먹어봐도 그 맛을 찾을 수가 없다.
올여름 유난히 장마가 길었다. 먹을거리가 마땅치 않을 때 KBS에서 특별기획 다큐멘터리로 방송했던 ‘누들로드’가 올해 제36회 한국방송대상시상식에서 영광의 대상을 수상하였다.
‘누들로드’란 프로그램은 ‘국수’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일목요연하게 보야 주는 작품이었다. 세계음식 전문가들을 통해 한 알의 밀알이 길고 가느다란 국수가 되어 세계인의 식탁에 오르기까지 인류 최초의 ‘국수’에 관한 기록을 살펴 본 알찬 프로그램이었다. 밀의 역사를 자상하게 알 수 있었다. 안방에서 이러한 프로그램을 시청할 때는 지구촌 곳곳의 음식문화를 눈으로 접해보는 기회이기도 하다.
특히 세계인의 공동체를 이어주는 밀의 변신은 현대인의 미각을 자극하고, 미끈미끈하고 기다란 모양의 스파게티는 기묘하고 매혹적이며, 파스타의 환상적인 칼라는 시각적이며, 감각적인 진화를 거듭하면서 인류의 식탁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결혼과 같은 경사스러운 날이면 특별한 의미와 소원을 담는 기원의 음식인 국수를 만들어 온 동네사람들이 모여 국수잔치를 벌였었다. 혼인식 날 부부의 연이 길게 이어지라고 국수를 먹었고, 돌잔치에는 무병장수를 나타내는 의미로 국수를 먹는다. 또 현대인들이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식사대용으로서 국수가 선호의 대상이기도 하다.
중국은 생일날 국수를 먹고, 일본에서 7월 7석에 견우와 직녀가 만나 소면을 먹는 뜻은 행운이 찾아온다는 속설이 있다. 태국에서 국수는 기쁜 날 먹는 음식이며, 길한 것이 지속된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아시아권에서는 문화는 달라도 공통된 점은 좋은 의미로 국수를 먹는다는 것이다. 밀을 손에 쥔 사람들은 그것을 신의 선물이라 불렀다고 한다.
국수는 저렴하다는 것이 장점이다. 한 그릇에 여러 가지 영양소를 두루 갖춘 건강한 일품요리이자 훌륭한 주식이다. 그 이유로 국수는 아시아, 중동, 유럽, 아프리카까지 널리 전파되었고, 수천 년 동안 인류의 배고픔을 달래는 구황음식으로서, 가족과 이웃을 잇는 공동체의 음식으로, 그리고 동서양의 문화와 문물을 잇는 문명의 음식으로서 인류의 사랑을 받아왔다고 한다.
오늘날 패스트푸드점이 점차로 늘어나면서 음식문화까지 세계화되고, 외식문화가 선호되면서 우리의 전통식품인 쌀 문화가 뒤로 밀리고 있는 듯하다. 그 하얀 쌀밥과 미역국 그리고 팥 시루떡은 생일날을 무척 기다리게 했고, 명절과 제삿날에나 먹을 수 있었다. 평소 기름기 자르르한 흰 쌀밥을 먹는 가정이 한 때는 부의 상징을 나타내기도 했었다. 주식인 쌀이 푸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국수의 역사는 내가 혼인할 1970년대만 해도 시집 언제 갈 거냐는 물음보다는 국수 언제 줄 거냐고 물었다. 그때만 해도 결혼식이 끝나면 신랑 집에서 피로연을 할 때 잔치국수가 곁들여져 먹었던 기억이 난다. 음식문화는 우리네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리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첫날밤을 맞았을 때, 어머님은 그 찰지기로 이름난 소머리찰떡을 같이 먹고 평생을 찰떡궁합으로 금슬 좋게 살라고 잔치상을 차려주셨다. 신랑은 찰떡을 좋아해서 먹는지, 찰떡궁합으로 살고 싶어서 먹는지, 맛있게 많이 먹었는데 그때 나는 소화불량이어서 찰떡을 먹을 마음이 없었지만 안 먹으면 안 될 것 같아 조금 먹었던 기억이 새롭다. 신랑은 신행하는 날 찰떡을 많이 먹은 연유로 지금까지 변함없이 신부를 아껴 주고 사랑해 주는 것 같아 단지 속설만은 아니라 생각하니 입가에 미소가 감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그리움이 밀려오는 이 가을에 내가 시집오던 날 먹었던 잔치국수와 소머리 찰떡을 생각한다. 오늘은 기계국수가 아닌 홍두깨 칼국수를 전수받은 내 손으로 밀가루반죽을 박달나무 방망이로 밀어 바지락 손칼국수를 맛깔스럽게 끓여 먹어야겠다.
(2009. 9. 26.)
공지사항
문화 류씨 이야기
ㅎㅇㅎㅇ
운조루 11대 정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