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이 지난 지 사흘째인 오늘도 여전히 그 감나무에는 빛바랜 감 하나가 매달려 있다. 아니, 감이라기보다는 감 미이라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수분은 다 빠져버리고 감 껍데기만 길쭉한 모양으로 늘어진 모양이, ‘지난 가을 붉게 물든 감잎 하나가 지금까지 붙어있는 게 아닐까’ 하는 모양새다. 입춘 열흘 전 만하더라도 그 감나무에는 쭈글쭈글한 홍시가 7~8개 매달려 있었다. 겨우내 몰아닥친 추위에 얼었다 녹았다 거듭했을 그 홍시들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초라한 몰골로 붙어있더니, 요 며칠사이에 다 떨어져 버리고 그 미이라 하나만 남아서 마치 그 감나무의 이름표처럼 붙어 있다.
우리 집 창문밖에 서 있는 그 감나무를 내가 눈여겨 보기 시작한 것은 지난 초겨울부터였다. 아파트 정원 나무들이 거무칙칙한 나목으로 삭막한 초겨울 풍경을 보여주고 있을 때, 그 감나무에 달려 있는 붉은 감 몇 개가 내 눈에 뜨였다. 꼭대기 쪽 높은 가지에 매달려 있는 그 홍시들은 아마 까치밥으로 남겨진 것들이었으리라. 처음에 그 감들을 쳐다볼 때엔 저 감들은 복도 많다. 땡감시절에는 햇빛, 바람 제일 잘 드는 높은 곳에서 맘껏 호강하고 컸을 터인데, 사람 손이 안타는 높은 곳이라 끝까지 남겨지는 복까지 누리니 역시 높은 자리가 좋긴 좋은가보다라고 생각했었다. 사람팔자로 치자면 좋은 집에서 태어나 부족한 것 없이 자라고 갖가지 행운을 누리며 끝까지 잘나가는 사람쯤 되겠구나 싶었다.
이번 겨울은 유난히 추운 날이 많았고 눈 쌓인 날도 여러 번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창밖을 내다보니 온 세상이 설궁(雪宮)으로 변해 있었고, 그 감나무 역시 가지마다 하얀 눈을 덮고 있었다. 특히 하얀 눈을 살짝 덮고 있는 주홍색 감 빛깔이 얼마나 예쁘던지 ‘와! 예쁘다, 저 홍시들은 눈꽃 이불도 덮어보고 하얀 눈 세상도 구경하고 감 팔자로는 최고로 호강을 하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눈이 녹고 며칠 지나서 그 홍시들을 보았을 때 나는 생각을 달리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혹독한 추위를 겪고 난 홍시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얼어서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만 같은데 터트려지지도 않고 추워서 벌벌 떨고 있는 듯 보이는 그 홍시들은 “아! 까치님은 왜 안 오실까, 어서 와서 우리를 데려가 주세요.”라고 울부짖는 듯 보였다. 너무도 추워 보이는 그 홍시들은 이제 행운의 주인공이 아니라 선택 받지 못하고 버려진 존재로 보였다. 사람에게도 까치에게도 외면당하고 잊혀진 쓸모없는 감이되고 만 것이다. 한 개의 탐스런 과실로 익어 누군가의 생명의 기운을 돋우어 주는 음식이 되는 것이 감에게 주어진 본분이라면 그 감들은 분명 불행한 과실이 되고 만 셈인데, 그 까닭은 너무 높은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 높은 자리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니구나 싶었다.
입춘 사흘 전이었다. 거실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창밖을 내다보다가, 내 시선은 버릇처럼 그 감나무에 머물렀다. 그런데 이상했다. 하룻밤 사이에 감나무가 텅 비어 있었다. 어제까지 분명히 달려있던 감들이 다 어디로 갔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궁금해서 그 감나무 아래로 가보았다. 감나무 밑에는 떨어진 홍시들이 터진 채 누워있었다. 어쩐지 섭섭해서 감나무를 올려다보며 여기저기 살펴보다가 그 감을 발견했다. 감나무 꼭대기 옆 가느다란 가지에 길쭉하게 일그러진 감 한 개가, 마치 나무늘보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모양새로 달려 있는 게 아닌가. 그게 사람이라면 헤어지기 싫은 연인처럼, 자식을 멀리 떠나보내는 어머니의 마음처럼 손을 꼭 붙잡고 놓지 못하는 안타까운 장면이었다. 차마 이별할 수 없어서 잡은 손을 놓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그 감나무. 나는 그걸 쳐다보면서 혹시 나무나 열매들도 저희들끼리 주고받는 어떤 신호를 통해 감정을 교감하는 것은 아닐까 엉뚱한 생각을 해 보았다. 그리고 아주 가느다란 감나무 가지에 끝까지 매달려 있는 그 감의 입장을 상상해 보았다. 어쩌면 저 감은 저 감나무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자란 꿈의 기대주였으리라. 햇볕, 바람 잘 드는 자리에서 마음 놓고 크게 자라서, 세상에서 가장 크고 탐스러운 감이 되어보라고 벌레도 사람 손도 못 타게 감나무는 막아주었으리라. 그렇게 자란 감이 다 쭈그러진 몰골로 입춘을 맞고 있으니 저 감나무도 감도 너무 서러워서 헤어지지 못하고 저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상상을 해 보니 길쭉하게 일그러진 그 감을 칭찬이라도 해 주고 싶었다. 비록 다른 생명체의 양식으로 선택받지는 못했지만 저 길러낸 감나무의 이름표라도 되고파서 죽을 힘을 다하여 매달려 있는 그 '감 미이라'. 그것이 사람이었다면 지성스런 효자였을 테고 더 나아가 진정한 애국자가 되었겠다 싶어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유난히 춥고 길었던 이번 겨울, 까치밥으로 남겨진 홍시 몇 개가 까치의 양식으로 선택받지 못하고 내 마음의 까치밥이 되었다. 그 덕에 나는 이것저것 생각하고 상상하면서 지루하지 않은 겨울을 보낼 수 있었다. 그 까치밥이 주는 교훈, 높은 자리가 한 때는 좋은 시절도 있겠지만 만고풍상을 겪어야하는 뼈아픈 인내와 책임감이 뒤따른다는 것을 느끼면서, 내가 보통자리에서 보통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음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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