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달 그믐밤 잠을 자면 눈썹이 희어진다. 맛있는 설음식을 장만하니 잠을 자지 않고 먹고 싶은데, 무정한 잠이 와서 세상모르고 잠을 잤다. 설날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니 눈썹이 하얗다.
“에잉 나 몰라!”
밤늦게까지 음식을 장만하며 밀가루를 칠한 어머니와 큰형수님은 재미가 있어 파안대소(破顔大笑)로 피로를 푸셨다. 아들 삼형제를 키우면서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어느 해 그믐밤 초등학생인 막둥이가 잠을 잔 우리 내외의 눈썹에다 밀가루를 칠해 놓아 설날 아침 한 바탕 웃었던 추억이 새롭다.
설 명절이면 주고받아서 기쁘고 즐거운 선물이 오간다. 큰 사부인이 열흘 전 일찌감치 찐빵 한 박스를 안은 세종대왕님을 모시고 왔다. 설 바람이 불었다. 아내와 상의하여 김 한 박스를 신사임당님 편에 갔다 드렸다. 옛날에는 집에서 담근 막걸리 한 병과 생 명태 서너 마리가 오갔는데 지금은 현금 봉투가 오가니 많이도 변했다. 변하지 않은 것은 변하는 것뿐이란다.
작년 설에 우리가 새 사돈집에 소고기를 보냈더니 전복이 왔다. 추석에는 그 집에서 소고기가 와서 우리는 전복을 보냈다.
아내한테 며느리를 통해 서로 편하게 선물을 생략하기로 했다는 말을 들었다. 평소에도 별미다 싶으면 서로 주고받는, 연중 선물을 하자는 제안이니 마다할 리가 없다. 그랬는데도 결국 그 집에서는 백화점에서 구입한 꿀단지를 보냈다. 역시 대 명절에는 선물이 오가는 것이 좋을 성싶다.
아내와 큰며느리는 사전에 필요한 자료를 어떻게 구입할지를 상의한다. 나는 임과 함께 홈플러스에 가서 당면, 방울토마토, 오이, 시금치, 돼지삼겹살, LA갈비를 샀다. 부각은 옛날 어머니가 하듯 미리 부쳤다.
그믐날 오전에 부산에서 근무하는 큰아들과 우리와 같은 동에서 따로 사는 막둥이네 식구 등 우리가족 9명이 다 모였다. 미국 뉴욕에 있는 둘째아들네 식구 네 명은 당연히 불참이다. 나는 우선 중학교 2학년이 될 손자와 목욕탕에 가고, 아내와 큰며느리는 음식을 장만한다. 막내며느리는 손녀 은수를 봐야한다. 10개월이 지나자 무엇인가를 잡고 일어서거나 기어 다니면서 닥친 대로 잡아당기니 그 애를 봐주지 않으면 아내가 할 일을 못한다.
점심때 우선 돼지 삼겹살을 삶아 새우젓을 얹어 김치에 싸서 샴페인 와인을 터뜨렸다. 저녁에는 요리연구가인 큰며느리가 팔보채와 해파리냉채 요리를 만들어 멋진 설 잔치를 벌였다. 우리 집은 항상 그믐날 밤이 하이라이트다. 따지고 보면 눈썹이 흴까봐 자정까지 잠을 안자니 제대로 설을 쇤 셈이다.
설날 아침에는 굴, 바지락떡국과 함께 나이를 먹는다. 온 식구가 공평하게 먹는 것은 이것뿐이다.
“안 먹으려도 안 먹을 수 없고, 아무리 먹어도 배도 안 부르고 많이 먹으면 죽는 것이 뭐냐?”
어려서 어머님이 낸 수수께끼였다. 두 아들 내외에게 세배를 받고
“금년은 너희들이 소원성취를 하도록 돼 있는 호랑이해다.”
덕담을 건네고 세뱃돈 2만 원씩을 주었다. 손녀 두 명과 손자에게 세배를 받고 덕담과 함께 만 원씩을 주었다. 작년 설에는 손녀 은수가 뱃속에 있어 5천 원을 주었었다.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갈 손녀 영인이가 좀 억울하겠지만 할 수 없다는 말을 덧붙여 주었다. 우리의 경제사정 때문이라기보다는 철학이 담긴 재미있는 이벤트다. 이때 미국에 있는 둘째며느리와 아들, 쌍둥이 손자한테서도 전화 세배를 받았다. 세뱃돈 6만원은 폰뱅킹으로 미리 보냈다. 올해 설은 발렌타인 데이가 겹쳐 두 며느리한테 초콜릿과 돈 봉투를 받았다. 11시에 두 아들네 식구들은 처가·친정·외갓집으로 떠났다. 익산에 사는 생질내외가 내 누님을 모시고 아들과 함께 왔다. 임실호국원에 계신 자형 성묘를 하고 온 것은 예상대로였다. 세뱃돈이 나가도 반가웠다.
설이라는 말은 '사리다', '사간다'라는 옛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삼가다' 또는 '조심하다'라는 뜻이다. 설날은 일 년 내내 탈 없이 잘 지낼 수 있도록 행동을 조심하고, 조심스럽게 첫 발을 내딛는 매우 뜻 깊은 명절로 여겨져 왔다. 금년 설은 떡 고에 맞추어 떡을 찍듯이 그 틀에 맞게 설을 지냈다. 딸이 없는 우리 집은 설날 오후면 단둘이만 남는다. 아들 식구들이 떠난 뒤 TV앞에 앉았다. 캐나다 밴쿠버동계올림픽과 일본 도쿄에서 열린 한일축구경기를 보았다. 밴쿠버의 낭보에 우리나라 선수가 일본선수를 3:1로 이겨서 좋은 기분은 더 부풀었다.
내 어린 시절 어머니는 섣달이 되면 초순부터 설음식을 장만하셨다. 사부인과 절에 다니는 보살님을 집에 모셨다. 이과, 콩과자, 쌀강정(오꼬시), 콩강정, 엿을 만드셨다. 방에 군불을 뜨끈뜨끈하게 때고 과자를 말렸다. 식혜와 떡과 전은 그믐날 빚고 부쳤다. 머슴이 떡메를 치고 형수님이 손에 물을 적셔 개를 넣어주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증조부모와 아버지 어머니에게 세뱃돈을 받은 기억은 없다. 친구들과 동네 큰 어른 두어 분께 세배를 하고 음식상을 받아먹었다. 그리고는 연날리기와 팽이치기, 제기차기를 신바람 나게 하고 놀았다. 손등이 터서 피가 나도 좋았다.
나는 일흔 세 번 설을 쇠었다. 지낸 설의 수는 셀 수 있으나 다가올 설은 몇 번일지 알 수 없다. 백 번을 채우라 한들 누가 마다하랴만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사가 아니던가.
[2010.2.14.일.설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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