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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김재훈
ㆍ작성일	2010-04-25 (일) 19:05

ㆍ추천: 0 ㆍ조회: 3127

또 한 번 모란이 필 때까지
또 한 번 모란이 필 때까지

행촌수필문학회 김재훈

꽃의 계절이다. 새봄과 함께 개나리가 먼저 꽃망울을 활짝 터뜨리더니 진

달래가 뒤를 잇고 지금은 목련과 벚꽃이 한창이다. 겨우내 길고 단조롭기

만 하던 길가 분위기에 생기와 환희의 물결이 넘쳐난다. 남녘엔 벌써 꽃놀

이 관광이 한창이라는 소식이다.

벚꽃이 질 때쯤이면 모란이 그 요염한 듯 우아한 자태를 뽐낼 것이다. 지

난 해 남도 여행길에 김영랑 시인의 생가 마당에서 본 모란은 탐스러웠다.

봄의 향기를 오래 맡아서 취해버린 모습인가, 붉디붉은 얼굴로 피어나는

모란은 시인의 말처럼 그 꽃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에야 우리에게 봄을 여

읜 설움에 잠기게 할지도 모른다.

나는 모란을 생각하면 사진 속의 장인 얼굴이 떠오른다. 모란을 배경으

로 장모님과 함께 찍은 한 장의 사진 때문이다. 그때가 5월이라 했다. 몇

개월 전 고향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나 아직 장인어른의 직장이 있는 서울

에 신혼살림을 차리지 못하고 떨어져 있던 터에 장인이 장모를 불러 올렸

던 모양이다. 때마침 만화방창한 봄이라 덕수궁으로 봄나들이를 가서 인

생의 봄, 고궁의 봄 정취를 한껏 즐기다가 모란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슬픔의 봄나들이가 될 줄을 그 누가 짐작이나 하였으랴.

장인 장모님의 단꿈은 모란이 지듯 얼마가지 못해 스러지고 말았다. 한 달

후에 발발한 6.25전쟁이 그 모든 것을 앗아갔기 때문이다. 파죽지세로 밀

려오는 북한 인민군은 서울을 점령하고 경상 전라지방에까지 순식간에 들

이 닥치면서 점령지마다 우익 핵심 인사들을 색출하여 처단하였다. 처 외

할아버지도 지방 고위 공직에 계셨기 때문에 인민군들의 우선 표적이 되

어 화를 입었다.

갑작스레 불어 닥친 불운에 경황이 없던 장모님에게 이번에는 서울에서

대학병원 의사로 있던 남편마저 인민군에게 끌려갔다는 소식이 왔다. 불

러오는 배를 조심하며 고향 친정집에 머무르고 있던 장모는 하루아침에

아버지를 잃고 남편까지 빼앗기는 몸이 되었다. 아직 스물두 살 밖에 되지

않은 장모님에게 감당할 수 없는 불운이 한꺼번에 밀어닥쳤던 것이다.

신혼의 단 꿈에서 채 깨어나기도 전에 젊은 아내를 남겨두고 인민군에

끌려가는 장인의 심정이 오죽하였으랴. 그렇게 끌려가면서도 장모님의

사진 한 장을 고이 지니고 갔다는 말을 누군가에게서 들었다고 했다. 그것

이 이토록 긴 이별이 될 줄 알았더라면 장모님으로서는 차라리 못 들은 편

이 나았을 것이다.

세월은 그동안 많이도 흘렀다. 이제나 저제나 하며 기다려온 시간이 어

언 60년, 남들은 이산가족 면회다 뭐다 해서 연락이 오가지만 장인은 아

직도 소식이 없다. 장모님은 그날의 일들이 지금도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며 긴 한숨을 쉬시곤 한다. 덕수궁 봄나들이와 전쟁, 그리고 이

별… 아마도 장모님의 남편에 대한 마지막 기억은 그때 덕수궁에서 모란

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던 일일 것이다. 장인어른이 지니고 갔다는 사진

도 혹시 그 사진은 아닐까?

꽃의 계절인 요즘, 아내는 차를 운전할 때마다 CD를 켜 놓고 ‘모란 아가

씨’ 노래를 들으며 흥얼거리기를 좋아한다. 옆 자리에 앉아 아내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마치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의 심정을 대신 읊조리고 있는

것만 같아 가슴이 아리다. 아내는 그때 장모님 배속에 있던 바로 그 아기

다.

모란은 벌써 지고 없는데

먼 산에 뻐꾸기 울면

상냥한 얼굴 모란 아가씨

꿈속에 찾아오네.

세상은 바람 불고 고달파라

나 어느 변방에 떠돌다, 떠돌다

어느 나무 그늘에

고요히, 고요히 잠든다 해도

또 한 번 모란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또 한 번 모란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영랑시인은 모란이 다시 피기까지는 아직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다. 장인어른도 아직 북녘 땅 어딘가에서, 얼굴도 모르는 당

신의 딸이 읊조리는 이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기다리고 계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