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의 빗줄기가 굵어지고 있다. 온 종일 내리는 것을 보니 장마가 시작되는 모양이다. 처마 끝 추녀에서는 더욱 굵은 낙숫물이 마치 폭포처럼 사납게 떨어져 요란하다. 이때쯤이면 뭔가 있을 것이라 짐작한 나는 눈이 빠질 세라 물길을 쳐다보았다. 역시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헤엄쳐 올라오는 것이 있었다. 미꾸라지였다.
꽝 꽝 꽝
칠흑같이 어두운 밤! 주룩 주룩 내리는 빗소리를 뚫고 솟을대문이 부서지는 듯 요란한 굉음이 들리는데,“주인 어르신, 주인 어르신.”하고 숨넘어가듯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사랑채에서 아버지의 품에서 잠든 나는, 놀라 일어나신 아버지를 따라 마치 용수철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나 호롱불을 켰다. 대문 여는 소리가 밤의 적막을 깼고, 문밖은 환하게 장명등도 켜지고 안채에서는 두세두세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다. 박 생원은 자기 집 외양간의 소가 없어졌다고 했다. 박 생원은 우리 집 쟁기질을 전담하는 머슴으로 소를 자기 집에서 먹이고 있었다.
우리 집은 대가족이었다. 우리 집을 중심으로 큰형님, 당숙님, 넷째형님, 작은집, 둘째형님 집들이 바로 이웃해 있고, 여섯째 형은 아래채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금세 전달되었다. 공무원으로 근무하다가 농업에 전념하고 있었다.
모여 든 사람들은 형님들과 장정이 된 조카들로 어림잡아 20여 명은 되었다. 전직 수사경찰이셨던 큰형님의 주도로 빠른 시간에 회의를 마쳤다. 다음날이 S장날이고 그 장날이면 읍내에서 우시장이 크게 열렸다. 비는 계속 주룩 주룩 내리고 있었다. 손전등 3개가 동원되어 3조로 나뉘어 S읍 방향으로 도둑을 뒤쫓았다. 집안은 다시 적막으로 싸였다. 아버지와 어머니, 형수님들 그리고 누나들뿐이었다. 아버지의 담뱃대 터는 소리에 깜짝 놀라기도 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적막을 깨고 멀리서 외치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렸다. 소를 찾았다는 소리인 듯하였다.
우리 마을은 45가구 정도이며, 대대로 한 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마을의 중심부에는 한 씨들이 살고, 타성은 동네어귀에서 살고 있었다. 김 씨, 박 씨, 오 씨 등 다섯 가구에 불과했다. 쟁기 머슴인 박 생원도, 힘세고 거칠며 도벽이 강한 김 생원도 어귀에서 살았다. 둘은 서로 친하게 지냈다. 어느 날 김 생원은 박 생원에게 소를 훔치고자 도와줄 것을 간청했다. 박 생원은 비 오는 날 소를 내주었는데, 겁이 많고 마음이 약한 박 생원은 초조하고 불안하여 약속한 시간보다 빠르게 우리 집으로 달려와 소를 도난당했다고 알린 것이었다.
소도둑을 쫓던 일행은 소와 송아지를 앞세우고 돌아왔다. 한참 후에 큰형님의 설명이 있었다. 모두 몽둥이 하나씩 손에 들고 출발하고, 큰형님은 천천히 뒤를 따라 갔다. 냇가에는 흙탕물이 가득 내려가고 큰길 옆 논에서는 모내기를 하고 남은 모들이 흩어져 있었다. 이리저리 살피며 가는데 언덕 밑에 못짐 지게가 있는 것처럼 보여 스치려 하는 찰나, 움직이는 것이 눈에 띠어 발을 멈추었단다. 겁 없는 송아지가 빗물이 흐르니 싫어서 꼬리를 흔들었던 것이다.
소는 몸은 크지만 눈이 크고 겁이 많은 동물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지나갔는데도 꼼짝도 하지 않고 빗속에 서 있었던 것이다. 또 도둑이 끌고 가는 데도 풀 있는 곳으로만 가니 발자국도 없었단다. 비 오는 날 밤에 바쁘게 소를 몰고 가던 김 생원이 1킬로미터쯤 갔을 때 뒤에서 "소도둑놈, 게 섰거라!"고 외치는 소리와 불빛에 놀라 소와 송아지를 냇물을 건너 옆 산으로 도망을 갔단다. 그리하여 소를 찾았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수근 대는 소리가 오랫동안 이어졌다. 1957년도 여름이 가기 전 우리 마을에는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마을 어귀에 살던 김 생원이 밤에 가족과 함께 이사를 갔고, 쟁기 머슴인 박 생원도 서울 영등포의 연탄공장으로 일을 찾아 떠났다. 고생하지 않고 편하게 살려는 김 생원, 평소에 남의 것을 탐내는 나쁜 습관으로 제 버릇 개 못준다는 말을 실증하였고, 박 생원은 김 생원의 억압에 못 이겨 협조하게 되었단다. 조용한 시골 마을의 어수선한 분위기는 죄를 지은 자들이 떠남으로써 막을 내렸다. 도둑이 제발 절인다는 격언은 옳은 말이었다. 선인들의 슬기로움을 엿볼 수 있는 참 좋은 속담이었다.
(2010.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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