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례 운조루(雲鳥樓) 공식 홈페이지 ▒

ㆍ작성자	김효순
ㆍ작성일	2010-06-18 (금) 20:15

ㆍ추천: 0 ㆍ조회: 2615

산딸기
산딸기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목요야간반 김효순

눈 맞으며 피던 매화를 앞세워 전해지던 꽃소식이 뜸하고 그리 오만하던 장미의 빨강 잎들도 하릴없이 쏟아져 내리는 오뉴월. 향기 아닌 ‘냄새’ 를 풍겨대는 밤꽃에 취한 뻐꾸기의 선창으로 산새들의 합창이 경쾌한 산모퉁이를 돌다가 또 산딸기와 만났다. 아니 내 젊은 엄마의 어색한 미소와 만났다. 많은 세월이 흘러서 이제는 남처럼 잊힌 얼굴이 되는데, 해마다 홍보석 같은 산딸기를 대하면 엊그제 일인 듯 먼 옛날의 엄마 모습이 떠오른다.
보통 사람보다 한 뼘은 작았던 엄마는 열아홉 살에 스물두 살짜리 신랑에게 시집을 왔다. 신랑이 군대에 다녀온 뒤에도 밖으로만 돌아서 그랬는지 본인에게 문제가 있었는지 시집온 지 7년 만에야 첫딸인 나를 낳았다. 손자를 학수고대하던 할머니는 낳은 지 3일이 지나자 핏덩이 손녀를 당신 방으로 데려가서는 젖먹일 때만 산모에게 보냈다고 했다. 엄마가 딴 살림을 났어도, 내가 열 살 되던 해에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나는 할머니와 살았다.
‘사람의 인격이나 습관은 열 살 이전에 형성된다.’는 교육학 이론을 모르는 엄마였는데도 내가 게으르고 동생들에게 다정하지 않은 것을 할머니의 잘못된 교육 탓이라고 했다. 딴 집에서 할머니의 가족으로서 공주처럼 살고 있던 큰딸에 대한 엄마의 마음이 어땠었는지는 잘 짐작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나는 친엄마를 잃고 계모와 계모가 데리고 들어온 동생들에게 둘러싸인 신데렐라가 되어버렸다.
할머니와 겸상으로 앉아 가끔 반찬 투정도 부리던 ‘우아한 밥상’에서 밀려나, 어린 동생들과 함께 하는 밥상은 ‘투쟁’이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엄마는 ‘저것은 언니가 돼 가지고 자기 입 밖에 모른다.’는 대사를 읊조리곤 했다. 또 농사철이면 바쁘고 지친 엄마는 저녁밥 짓는 일을 내게 맡겼다. 해질 무렵 동네 아이들의 놀이마당에 끼지 못하는 것은 참을 만했다. 그런데 창호지를 통해 들어오는 따스하고 평온한 햇살 가득한 방안에 앉아 책을 읽고 싶던 마음마저도 억제해야 하는 것은 서글펐다. 그 어린 나이에 ‘채울 수 없는 욕망’도 존재하는 삶의 신산스러움을 어렴풋이 느꼈다.
중학생이 되었다. 학부형 총회가 있는 날 담임선생님 면담도 하지 않고 서둘러 집에 가려는 엄마를 붙잡는 내게, 엄마는 집에 두고 온 젖먹이 막내 동생 얘기를 꺼내려 했다. 당황한 나는 친구들이 눈치를 챌까봐 얼른 엄마 등을 떠밀었다. 그런 나를 보던 엄마가 겸연쩍게 웃었다. 나 또한 엄마가 되면서 그날 그렇게 웃던 엄마의 속내가 헤아려질 때마다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일손이 많이 드는 밭농사에 지친 엄마는 상대적으로 일이 적은 논농사만 짓는 동네로 이사를 했다.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던 해다. 그러나 입이 많은 우리 집에서 밭에서 나는 부식거리의 비중을 간과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엄마는 걸어서 30분이나 걸리는 이웃 동네에 밭을 빌어 고추를 심었다. 밭 농사일을 피해서 이사까지 했지만 만만치 않은 고추 값을 아껴야 했다.
고추 속으로 숯불 같은 태양빛이 빨려들고 밭고랑에서 올라오는 더운 김에 고춧잎이 쪄지는 것 같은 날인데 엄마는 나를 앞세워 고추를 수확하러 나섰다. 야산을 개간해서 만든 어설픈 황토밭에는 그다지 실하지 않은 고추가 듬성듬성 달려 있었다. 오히려 밭둑 너머 풀숲에서 가시넝쿨로 울타리를 치고는 저만치서 익은 산딸기가 탐스러워 보였지만 뱀이 나올까봐 접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나보다 훨씬 키가 작은 엄마가 그 안으로 선뜻 걸어 들어갔다. 풀숲 속에 들어간 엄마는 머리만 보였다. 한참 후에 돌아온 엄마가 산딸기 한 움큼을 내 손에 쥐어 주면서 겸연쩍게 웃었다.
“엄마 먹어.”
“아니, 나는 신 것은 싫다.”
그것을 내가 다 먹었는지 엄마도 한 개쯤 맛을 보았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데 그 순간 엄마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나도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날 열여덟 살짜리 여린 딸의 머리 위로 내리 붓는 모진 뙤약볕을 엄마가 야속하게 생각했던 것도. 엄마의 그 웃음에 대한 추억이 더는 없다. 꼭 한 해 뒤에 엄마는 영영 내 곁을 떠났으니까.
모든 만남은 인연에 의해서 모였다가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는 것이라지만 엄마와 나의 짧았던 인연은 전생 어디에서 묶였던 매듭이었는지? 너무 헐거워서 이렇게 쉽게 풀려 버린 매듭이라서 다음 생에서 다시 묶일 수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