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이 터지던 그해 여름
한국전쟁이 터지던 그해 여름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정장영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하지(夏至)로 여름에 이른다는 날이다. 올해가 한국전쟁발발 60주년이다. 잊지 못할 여름이고 감회가 새롭다. 예로부터 인명은 하늘에 있다(人命在天)고 했지만 그간 전쟁과 지진, 풍수해, 전염병, 교통사고, 화재, 그 밖의 인재 등으로 희생된 인명이 모두 하늘의 뜻이었던가, 아니면 비명횡사였던가? 어김없이 돌아오는 수많은 여름 가운데 이 한 철을 잘 넘겼기에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50념 경인년(庚寅年) 여름 하면 나로서는 생사의 갈림길이었다. 국가적으로는 학제변경(6.3.3.4.제)에 이어 태평스런 학원 분위기를 깨고 6.25발발은 국가 존망의 기로(岐路)가 되었다. 당시 남원에는 남원공립농업중학교(6년제)와 남원공립중학교(3년제)가 있었다. 광복 후 귀국하여 뒤늦은 학업이었지만 나는 그때 5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또 건국 이래 처음 실시되는 징병 제1기(1929.9.1.~1930.8.31.) 대상이기도 했다.
6월 25일 일요일 새벽, 북괴의 남침이 시작한지 1주일이 지난 토요일 오후였다. 모내기에 바쁜 농촌이었지만 나는 월요일(7월3일) 징병검사를 받기위해 남원에서 순창으로 귀갓길을 서둘렀다. 순창 가는 국도 24호 길가에 그때로서는 보기 힘든 이삿짐 차 하나를 목격했고 보는 사람들의 분위기도 매우 뒤숭숭했었다. 아마도 수도권에서 달려온 것 같았다.
순창초등학교에서 많은 장정들에 끼어 징병검사를 받았다. 최종적으로 나에게 징병관의 질문이 있었다. 재학 중이니 졸업이나 하고 갔으면 좋겠다고 대답하고 대기석으로 갔다. 결과는 유보판정이었다. 나는 당시 기쁨이라기보다 학생이니까 으레 졸업하고 가야지 평범하게 받아 들였을 뿐이다. 그 뒤 지긋지긋한 이 여름을 견뎌야 했다. 1.4후퇴로 국민방위군 동원, 복학 뒤 장장 51개월이란 의무현역복무를 했지만 이 말(유보) 한마디가 산수(傘壽)가 되도록 살게 해준 씨앗이 된 것이다. 이날까지만 해도 전황을 비관적으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북괴군은 칠월 중순에 파죽지세로 남한을 석권(席卷)했으니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으리라!
이해 여름 3개월간의 생존싸움은 처절했다. 주민들은 밤마다 부역(負役)으로 파괴된 적성강다리를 복구하는데 시달려야했다. 그뿐이랴? 의용군 모집과, 인민군을 지원할 군노무자동원은 생사가 달린 일이었으니 집에서 그냥 빈둥거리며 지낼 수가 없었다. 하루가 천추(千秋)같았다. 하절기의 공적인 파리, 모기, 빈대, 더위, 배고픔 따위의 괴로움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이 있다. 가을이면 그들은 현물세 부과근거가 되는 생산고를 조사하였다. 비록 그들이 쫓겨 간 바람에 실행은 못했지만 마을마다 그들이 맡긴 일은 해내야했다. 각 논밭을 찾아다니면서 평당 작물의 포기 수, 포기의 주 수, 한 주에 달린 낱개수를 세어 전체 생산량을 산출하는 것이다. 걸핏 보면 과학적인 것 같지만 한 평의 선택여하에 따라 황당한 결과가 나오니 웃기는 일이었다. 더욱 곡식을 한 되가 몇 만 개식으로 즉 벼, 콩, 좁쌀은 몇 만 개 등으로 환산하여 수확량을 셈하라 했다. 그때만 해도 계산기란 수판(주산)밖에 없었으니 밤마다 몇 명 안 되는 학생들을 동원해야 했다. 형 때문에 반동가족으로 몰렸으나 나도 마을 이장의 간곡한 사정과 당부에 거역할 수 없어 참가했다. 그때 형은 그 와중에도 얼마 가지 못한다고 확신하고 산에서 나와 같이 피신생활을 하던 중이었다. 수복직후 그들에게 협조했다고 부역(附逆)으로 간주되어 경찰지서까지 가서 “고백서”라는 것을 난생 처음으로 써야했다.
그간 UN군은 그들의 보급로를 끊기 위해서 적성강교량을 파괴하려고 여러 날 폭격을 한 바람에 교량 부근의 원촌마을은 폐허가 되었다. 인민군은 광주방면에서 순창을 거쳐 남원으로 갔지만 UN군 수복은 남원에서부터 진격이 시작되었다. 그날 종일 형과 같이 마을 뒷산에 숨어서 진주하는 미군을 보았다. 아침 일찍부터 비행기가 남원 순창 간을 오가며 정찰하더니 오후부터 포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어둑어둑한 석양이 되니 포성과 함께 화염이 따르는 포탄이 날아오는 광경을 목격했다. 물론 그날 밤 순창이 수복된 것이다. 비록 저항 없는 전투였지만 멀리서 종일토록 시간 가는 줄 모르게 구경 할 수 있었다. 전투란 죽지 않았으면 참으로 재미있는 전쟁놀이 같았으나 어두운 산골길을 내려와야만 했다. 이제부터 이곳은 밤낮으로 천하가 바뀌는 공포의 세상이 이어가게 될 줄이야 그 누가 알았으랴. 60년이 지난 오늘에도 한국전쟁은 해결되지 못했으니 한탄스러울 따름이다.
(2010.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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