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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박경숙
ㆍ작성일	2010-06-30 (수) 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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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
담

전북대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 야간반 박경숙

일기예보에선 분명 짙은 안개 후 맑음이었던 것 같은데 아직도 묵직한 안개가 낮게 깔려 있다. 공해가 심한 지역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한다.

저녁 약속이 있다는 남편의 전호를 받고나니 문득 적적한 마음이 들었다. 어느새 큰아이와 작은아이는 어깨 장난으로 서로를 부비며 TV 오락프로그램에 빠져 있다. 가끔 설거지를 하면서 창밖을 보는 버릇이 생겼다. 오늘따라 유난히 불투명한 공기와 답답하게 느껴지는 회색 건물들이 꼭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 잠수함 같다. 한꺼번에 거리로 쏟아져서 신작로를 비집고 몰려다니는 자동차들의 모습은 마치 물결 따라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떼를 지어 길을 내고 뒤차는 그 길을 따르고 있었다.

701호가 이사를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인사 몇 번 한 게 고작이지만, 나는 702 호에 살고 있다. 정 떨어지는 이기주의에 어느 사이 나도 물들어 가고 있는 것일까. 서로에겐 공통점이 없다고 해야 하나. 굳이 이유를 대자면 자녀와 부모를 둔 아내와 평범한 남편이겠고 한 동네에 살면서 같은 마트에서 장을 보고 얼마 전까진 선거구도 같았었지. 오랜 별거생활을 하며 살았다는 걸 며칠 전에야 알게 되었으니, 얼마나 오랫동안 옆집과 인사가 없었던가? 일몰을 앞두고 썰물처럼 세간이 빠져나간 휑한 공간은 옆집과의 사이를 더 크게 만들었다.

귀가 어둔 할머니가 치매에 걸리면서 부부 사이가 부쩍 나빠졌다는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미확인 비행접시와 같이 불시착한 괴 소문은 아랑곳없이 삽시간에 번져 나갔다. 그러나 누구도 확인하지느 않았다. 아파트에서의 문은 앞집과 옆집 사이 단 하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사이는 닫혀 있고 그 담장은 높다. 너나없이 바쁘게 살아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문 채 마치 서로의 단절과 무관심에 변명거리라도 찾은 듯 한동안 아파트 주위를 맴돌았다. 옆집 사람들과 조금만 시간을 내고 서로 가까이 지냈더다면 이럴 때 속시원히 사정을 말해줄 수 있었을 텐데, 부질없는 생각과 안타까운 마음으로 되려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삭막한 콘크리트 숲 속 회색 도시에 살고 있자니 진심을 알아주는 사람을 찾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르겠다. 마음을 털어놓고도 괜시리 불안해지는 것은 내가 진실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매끄럽지 못한 어리버리한 말주변도 한 몫을 차지하지만 그도 아니면 두서없이 주저리주저리 넋두리를 하는 바보스러움이다. 이런저런 복잡한 세상사를 곱씹어 보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얼마 전 나는 마음에 있는 말을 두서없이 꺼내놓고 오히려 오해를 받은 적이 있었다. 차라리 침묵하였더라면…….

쑨리핑의 소설 단절을 읽어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의 단절을 경고하고 있다. 상층계급과 하층계급의 대립에서부터 도시와 농촌, 정부와 국민은 물론 가족과 사회의 단절은 결국 개인과 개인의 ‘신뢰 위기’ 라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게 된다고 말한다. 과거에 우리는 농경, 목축을 하면서 정주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최근 수백 년간 급격한 사회변화로 고도과학기술문명을 거쳐서 IT네트워크 사회로 점점 빠르게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그 결과 일본의 심리학자인 하세가와 마리코는 인류학자의 관점에서 볼 때 최근의 변화는 너무 빠른 변화라며 우려를 나타냈다. 역사의 99%를 수렵과 채집으로 보낸 인류가 그 스피드를 따라잡기 쉬울 리가 없고 그런 사회가 마음 편할 리가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사회 조직이 너무 대형화되고 역할이 세분화된 것도 마음의 불안을 가져온다. 결국 이렇게 마음 둘 데가 없고, 마음 편할 리 없는 사회와 조직이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마음을 통하려는 의도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바로 오늘날 화두가 되고 있는 소통의 문제다.

옛 조상들은 흙을 빚어 토담을 만들고 외부의 바람을 막기 위해 담을 쌓았다. 담이란 무엇인가. 담은 그저 사람살이의 가장 최소 영역의 공간이다. 험난한 세파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고 포장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안과 밖의 이분법적 상징이고, 영역의 확장이며 소유권을 나타내기도 한다. 내 마음 속의 그리움이며 아직까지 살아있는 토담은 시골 외할머니 집의 담장이다. 공주님 화관같이 가느다랗게 떨리는 샛노란 수술이 매혹적인 능소화가 곱게 피어 있고,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있었다. 밖에 있는 사람 역시 집 안의 사람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들여다보기 알맞은 높이로 담장을 세웠다. 이웃에서 빨래를 널고 있는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며 토담에 넘실거리는 호박잎을 나눠 먹었다. 턱을 괴고 담장에 모여 앉은 아낙들은 시집가는 딸아이의 걱정을 함께 들어주었다. 어머니를 따라나선 아이들도 담을 끼고 옹기종기 딱지와 팽이치기를 하고 동네 허물어져가는 담장에 보물같은 구술을 꼭꼭 숨겨두기도 했을 것이다. 엄동설한 북풍이 불어와도 어김없이 대문을 통해 담장에서 한 번 걸러졌다. 그리고 대청마루 곁의 솔가지와 동백꽃을 스치고 방안까지 이어진다. 토담은 이렇게 경계의 의미를 넘어 아무런 막힘없이 자유롭게 소통하였다. 담은 사람과 자연 속에 어우러져서 어느새 경계라는 표면적인 의미를 넘어 또 다른 소통을 의미했다. 이것이야 말로 옛조상들이 말하고 싶은 한국의 담이 품은 뜻이었으리다.

현대사회에서 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또 사람들의 마음의 담은 얼마나 높이 쌓여 있는가. 우리는 일상에서 많은 진실과 거짓을 함께 만나곤 한다. 날줄과 씨줄로 엮인 인생사 속에서, 행간에 숨어있는 글자 사이에서 그리고 달콤한 남녀의 대화 사이에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가식과 허구가 숨어 있다. 담을 쌓고 소통이 없는 우리의 삶은 진실과 가식이 양립하는 대척점에서 외줄타기를 하고 있다. 항상 두 눈 크게 뜨고 현실을 바로 보아야 하는 일상, 긴장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는 것이 현대인의 삶이다. 그렇다면 평안한 안식은 어디에서 만날 수 있을까? 영면의 세계에서, 아니면 담을 쌓고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

오늘 이사 간 옆집에 새로운 이웃이 이사를 왔다. 벽지공사로 분주한 여자를 보니 젊은 30대 부부인 것 같다. 엘리베이터에서 옆집 아주머니인 듯한 사람과 인사를 나눴다.

“심심할 때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

그녀가 밝게 웃었다. 더 이상 또 다른 옆집과 낯선 인사를 나누고 싶지 않다.

(2010. 0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