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내기를 하다가 마시는 막걸리 한 사발은 배고픈 농부님네의 시장기를 달래주고, 술기운에 농사일의 힘겨움을 이겨내기도 한다. 부족한 살림살이, 보리밥에 물을 말아 후루루 마시는 게 상일꾼의 한 끼 식사. 방귀 한 번 뿡 뀌면 금세 허기가 지는 배고픔을 막걸리로 이겨낸다. 막걸리, 조상들이 마시던 텁텁한 서민주 한 사발을 쭉 들이키고나서 흙 묻은 손가락을 옷자락에 문지르고 김치 한 쪽을 입에 물면 그것으로 흡족하다.
막걸리가 밋밋하여 소주가 그 임무를 대신한다. 독해서 작은 잔, 그 잔으로 한 잔 홀짝 그리고 또 한 잔. 작은 잔이 감질나서 부어라 마셔라 외쳐대다 어느덧 커다란 맥주컵에 한 잔 가득 쭈욱 들이킨다. ‘건강하니 마시고, 죽으면 못 마시니 마실 수 있을 때 마시자. 지화자!’ 그렇게 떠들던 이는 간이 굳고 복수가 차올라 급기야 저승길 행이다. 술과 아까운 목숨 바꾼 셈이다. 짧고 굵게 산 인생이다. 그것도 삶의 한 방법. 흐느적 흐느적한 삶이 즐거워라. 지루한 인생, 맥주컵으로 남은 목숨 빠르게 고갈시킨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기뻐하며.
백 살까지 사는 게 우리의 꿈인가? 마시고 마시면 백 살까지 살게 해준다며 변기위에 딱지 붙여 홍보하며 세상에 나온 술, 백세주! 그 술을 마시면 백 살까지 살까? 의심 반 기대 반. 술잔을 기울여 마셔보니 덤덤하다. 백 살까지 사는 것은 모두의 희망, 조금씩 보약 먹듯 마셔본다. 술을 마시는지 약을 먹는지, 밋밋하고 감질 나서 마시기에 짜증이 난다. 한 잔 한 잔 마시다가 술기운이 오르면 주관도 바뀐다. 혀 굳은 소리로 ‘길게 살아 무엇하리, 재미있게 살아야지. '지화자!’라 외친다. 또 짧고 굵게 살기를 바라는 눈치다. 술에 취해서 기꺼이 오십 살의 나이를 삭감하는 결단력을 보인다. 오십세 주, 소주 반에 백세주 반을 섞는다. 그 순간 장수의 꿈은 사라지고 짜릿한 자극만 남는다. 비싼 술값으로 수명을 과감하게 할인한다. 잘 나가던 전직 대통령도 재임 때 오십세주 마시더니, 그래서 빨리 갔나?
맥주가 있다. 무더운 여름 시원한 나무 그늘에 앉아 한 컵 홀짝. 목을 타고 넘는 짜릿함과 시원함. 그 순간 무더위는 사라지고 시원함만 남는다. 더 시원하려 한 잔, 또 한 잔. 해는 기울고 아스팔트의 열기도 식었는데 마신 몸은 뜨겁다. 윗옷을 한 꺼풀 벗어던지고 바짓가랑이 불량하게 걷어 올린다. 신발도 벗어던지고. 더워 더워, 세상은 더워. 시원한 맥주 잔뜩 들이키는데 왜 자꾸 더워지나. 이상한 세상이다.
차가운데 더워지는 세상은 혼돈의 시대. 모든 것이 섞이고 합쳐진다. 그렇게 융합하고 새로운 것을 만든다. 퓨전이라 하나? 섞는 것은 어렵지 않다. 돈 벌고 공부하는 것 아니라면. 맥주와 소주도 섞어본다. 소맥이다. 소주와 맥주의 장점만을 합쳤다. 목줄을 타고 넘는 시원한 청량감에 빠르게 오르는 취기. 바쁜 세상인데 취하는 것도 빠르게. 호주머니가 얇아도 상관없다. 소주 한 병에 맥주 두 병이면 만족. 독하지 않으니 안주가 부실해도 걱정 없다. 앉자마자 건배하며 소맥 한 잔 들이키면 빈속은 금방 반응한다. 전광석화 같은 취기. 빨라서 좋다.
소맥이 서민의 술 나의 술이라면, 우리와 함께 섞이기를 싫어하는 이들이 있다. 자신이 서민이 아니라 느끼는 사람들, 뒤가 구린 사람들, 냄새나는 우리들과 섞이기 싫어하는 사람들. 그들은 사방이 꽉 막힌 어두운 곳에서 술을 마신다. 밝은 빛이 두려운 두더지들, 자칭 국민의 공복이라 차별하는 사람들. 그들은 지하 어두운 방, 밀실에서 술을 마신다. 그들이 마시는 술, 폭탄주. 세상을 폭파해버릴 것인가? 출세지향의 인간들, 높은 곳만을 향하는 인간들, 그들이 마시는 술은 우리와 다르다. 더 높이 오르기 위해 술잔도 쌓는다. 바벨탑처럼. 아래에는 맥주를 담은 맥주컵을, 그 위에는 양주를 담은 양주잔을. 일렬로 늘여놓고 멋지게 도미노놀이를 한다. 양주잔이 맥주컵 속으로 하나씩 떨어지며 나는 소리 ‘따다닥’, 거품소리 ‘부글부글’. 제 돈 안내고 공짜로 마시니 즐겁고, ‘의원님!, 검사님!, 국장님!’이라 부르며 똥구멍 긁어주니 흐뭇하다. “원샷!” 외치는 풍만한 미녀들의 농염한 눈빛. 너도 한 잔 나도 한 잔 부어대다 모르는 체 여기자 가슴도 만져보는 겁 없는 의원님. 낙마할 줄 알았는데 아직도 여의도에 그대로 앉아있다. 굵고 길게 사는 인생, 본받을 인생이다. 깜깜한 룸에 모인 두더지들, 소곤소곤 오가는 밀담. 날이 밝아 머리도 밝아지니, 아련한 꿈이런가. 암흑속의 밀거래는 믿을 수 없는 것. 부정을 함께하는 동지란 없다. 단지 자신의 이익에 충실한 불량배들뿐이다. 함께 마시던 폭탄주, 드디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폭발한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 술이 깨면 부정한 밀약이 지켜질 리 없으니, 속은 놈 언론에 발설하고, 고발하고, 뒤통수를 후려친다. 몰래 한 녹음 들이대고 치부책 들이대며. 어렵사리 공부해서 높은 권력 얻었건만 폭탄주 터진 파편 인정사정 안 봐준다. 피만 낭자할 뿐이다.
술 깨니 모두들 정신이 든다. 어제 마신 술에 후회하고 결심도 새롭게 한다. 반성으로 막걸리 한 잔. 막걸리가 화려하게 재기했다. 건강주다, 수출 잘 된다하니 줏대 없는 사람들이 연예인 옷 따라 입듯이 마시던 술까지 따라 마신다. 가소로운 건 외국인들마저도 막걸리 마시고 찌그러진 잔 머리 위에 뒤집어 보인다. 이국적인 문화라고 좋아라 한다. 김치냄새, 마늘냄새에 구더기 보 듯하던 것이 엊그젠데, 나라살림 나아지니 술도 문화라고 흉내를 낸다. 좋다. 우리 것을 좋아하니 나도 좋다. 단지 과음만은 따라하지 마라. 그리고 건강주라 과신하지 마라. 어디 건강주, 약주가 따로 있나? 적당하면 약주요 과하면 독주 아닌가. 신이 내린 축복, 악마의 저주. 술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미소 뒤에 비수를 품는 게 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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