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태양이 서산을 넘어가고 제법 선선함을 느낄 정도로 바람이 좋은 시간이다. 퇴근길 사람들의 손에는 갖가지 행복이 들려있지만, 마주하는 이들의 표정은 스쳐지나가는 바쁜 일상일 뿐이다. 하교시간만 되면 길가에 즐비하게 늘어선 학원차량들의 이름도 가지가지다. 그래도 늦은 시간 오가는 애들 중에 제법 큰 녀석들을 보면 맘이 덜 아프지만, 등에 멘 가방의 무게도 힘겨운 어린아이일 때는 가슴이 아프다. 맞벌이 부부들은 마땅히 맘 놓고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 학원에 보내야 하고, 늦은 퇴근시간에나 함께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아주 작은 체구에 힘겹게 메고 있는 가방을 보니 어릴 적 우리들의 책보가 생각났다. 도시에서 전학 온 친구나 몇 명의 친구들은 가방을 메고 다닌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 책보를 메고 다녔다. 그 작은 책보 안에 들어있던 추억들이 오늘따라 가슴속으로 파고든다.
그야말로 토끼와 발맞추고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지는 산골마을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20리가 넘었다. 아침이면 마을입구에 모여서 학년별로 줄을 서서 등교하곤 했었다. 노래도 부르고 구구단도 외우면서 말이다.
우리 동네는 70여 가구나 되는 아주 큰 마을이었기 때문에 등교하는 아이들의 줄도 제법 길었다. 하교 시에는 학년별로 파하는지라 학년별로 또는 몇이서 같이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뛰다가 걷다가 했었다. 보리가 익어 갈 때면 보리도 구워먹고, 깜정이 묻은 새까만 얼굴을 서로 바라보면서 깔깔대며 웃던 그 때의 추억들이 떠오른다. 산소 옆에서 보리를 구워먹다가 산소를 태우기도 했었다.
그 시절에는 보리밭 한 구석을 다 망가뜨리고 산소를 태워도 “예끼, 이놈들!” 이러시면서 야단을 치면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도망가면 그 뿐이었다. 삐비가 나올 때면 껌 대용으로 삐비를 뽑아 씹고, 더우면 냇가에 내려가서 멱도 감았다. 맨발로 엉금엉금 돌 위를 밟고 가서 쑥을 뜯어 귀를 막고 물장구를 치고 놀다가 추우면 큰 바위에 엎드려 한 숨 자고 추워서 일어나면 해가 뉘엿뉘엿하였다. 초등학교 시절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추억이고 지금은 맛볼 수 없는 즐거움이다. 책보, 난로 위의 누런 도시락, 학교에서 받았던 솥뚜껑 만하던 빵 .
그 중에서도 책보가 가장 재미있는 추억을 남겨준다. 지금 생각하면 넓은 정사각형의 보자기였다. 책을 밑에 깔고 도시락을 책 위에 얹고서 몇 바퀴 둘둘 말아 어깨에 차면 남학생이고, 허리에 차면 여학생이었다. 볼록한 도시락을 위에 놓고 둘둘 말려면 책을 몇 권이나 넣었겠는가? 아마도 책 두 세권에 공책 한 권, 도시락이 전부였을 것이다. 책보라는 한계 때문에 책을 많이 가져가고 싶어도 불가능했었다.
지금처럼 교실에 사물함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혹 엄마가 도시락반찬으로 김치를 넣으셨다가 방심하시어 김치 국물을 조금이라도 덜 빼면 큰일이었다. 학교 가는데 책보에서 김치 국물이 흘러나와 옷은 축축하고 바지엔 김치 국물이 튀고 책보안의 책들도 김치냄새로 가득했다. 한쪽은 빨갛게 물들고 낱장은 달라붙었다.
그래도 그때는 ‘에이씨’ '으메 어찌까잉~~' ' 냄새 징허구만~~~'하고 푸념 한 번 하고 나면 끝이었다. 아마도 자연 속에서 순수하게 생활해서일 것이다. 교실 안에 난로를 피면 맨 밑에 도시락을 놓으려고 우르르 달려가곤 했었다. 도시락 밑의 누룽지가 그리 맛이 있었기에 밑에 놓으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매시간 위아래를 바꿔놓으니 모든 도시락이 적당이 눌었을 텐데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시간만 나면 걸레와 양초를 가져 오라해서 복도와 교실에 엉뎅이를 맞대고 쪼그리고 앉아 구구단을 외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박자를 맞춰가며 양초를 문지르고 걸레로 광을 내기도 하였다. 어떤 친구들은 자기끼리 모여서 소곤거리면서 농뗑이를 치기도 했었다. 광이 난 복도는 뛰어다니기가 매우 조심스러웠다. 나이론 양말에 묻은 초 때문만은 아니었다. 복도가 미끄러워서 넘어지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요즘의 아이들은 누구나 귀에 무엇인가를 꽂고서 흥얼거린다. 제각기 흥얼거리니 친구들과의 대화가 필요 없을 것이고, 자기중심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때는 당연히 mp3 등 그런 것이 없었지만 필요치도 않았다. 책보속의 도시락에서 발 맞춰 즐거운 음악을 내보냈으니 말이다. 걸으면 딸랑딸랑~~ 멈추면 자연의 소리. 등교 길이던 하교 길이던 달리려면 한 손은 반드시 책보를 잡아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옷핀이 있었을 텐데 옷핀을 꽂고 다닌 기억은 없다. 물론 등굣길엔 지각이다 해도 뛰어본 기억이 없다. 행여 뛰다가 도시락이라도 튕겨져 나오면 큰일이 아닌가! 옷에 묻은 김치 국물이야 벗어서 대충 물에 헹구어 다시 입으면 그만이고, 김치 국물이 묻은 책이야 하기 싫은 공부 안하면 그만이지만, 밥을 굶어야하지 않은가. 세상천지가 놀이터여서 학교 가기도 싫고 공부가 싫으면 뛸 필요가 없었다. 자칫 방심하면 애지중지하던 몽당연필이 굴러 나오고 책이 솔솔 나오고 도시락마저 튕겨져 나오니 말이다. 아마도 그때는 뒤에 오던 애들은 상당한 수입이 생겼을 것이다. 비포장 신작로에는 책보 속에서 빠진 연필이 나뒹굴고 가끔은 공책도 있었으니 말이다.
책보에 감사하고 싶다. 가난의 상징이었지만 책보란 한계 때문에 학교에 책을 많이 가지고 갈 수도 없었고, 공책이 김치 국물 묻었다고 공책을 사야한다는 핑계로 용돈을 탈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초등학교 때 공부 안하고 자연을 벗삼아 신나게 논 덕분에 인성이 갖춰졌고 중학교 이후 더 열심히 공부할 수 있는 체력과 잠재력을 키웠다.
공부에 연연하지 않았어도 다 잘 나가는 사람들이 되었고, 나름대로 각기 다른 분야에서 멋진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헌데 지금의 우리 아이들은 어떤가?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책과 싸우느라 소중한 추억이나 진정한 친구들과 중요한 인성교육에서 점점 멀어지는 게 현실이다.
부모들 역시 바쁘다는 핑계로 자녀들과 함께하지 못하고 있고 대화도 단절되고 있다. 아이들의 불만과 불신이 쌓이고, 아이들이 점점 나약해지는 것 같다. 감당하기 힘들면 남의 탓만 하는 현실이 되어 버렸다.
우리에게 소중한 추억 하나가 있어서 다행이다. 그 추억이 먼 훗날 우리의 입가에 미소를 머물게 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좋은가! 공부도 좋고 학벌도 좋고 돈도 좋지만 먼저 인간이 되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실에 발맞추어 가야겠지만 강박관념에 얽매어 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공지사항
문화 류씨 이야기
운조루 11대 정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