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례 운조루(雲鳥樓) 공식 홈페이지 ▒

ㆍ작성자	김병규
ㆍ작성일	2010-08-11 (수) 17:46

ㆍ추천: 0 ㆍ조회: 2263

가면을 벗어버린 두 여인
가면을 벗어버린 두 여인

행촌수필문학회 김병규

나는 열심히 재활운동을 한다. 하루 속히 회복하여 다가오는 가을부터는 내 인생에 아름다운 꿈을 엮어가고 싶어서다. 나처럼 오랫동안 병상생활을 했거나, 몸이 허약한 사람은 자신의 몸에 알맞게 걷는 것이 최상의 재활운동이다.

사람은 직립보행(直立步行)하는 존재여서 허리가 튼튼해야 걷는데 지장이 없다. 허리뼈가 네 마디나 부러져서 시술한 나는 걸을 때 몹시 불편하다. 지팡이를 짚어 몸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조심스럽게 걷는데도 때때로 허리가 뻗지르고 땅겨 곤욕을 치른다. 멈춰서 숨을 고르고 몸의 균형을 잡는데 한 참 시달린다. 조심스럽게 걷다가도 돌부리에 채이거나 발을 헛디디면 바로 허리에 자극이 가 깜짝깜짝 놀란다. 조심하면 할수록 그런 경우가 많다. 요철이 심하거나 날카로운 바위가 솟아있는 길을 걸을 때는 더욱 신경이 쓰인다. 좁은 등산길에 뒤에서 떼를 지어 몰려오는 사람들을 만나면 비켜서서 그들이 모두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때면 사람들의 면면을 눈여겨 본다.

건지산의 등산객은 여성이 많다. 남성은 극소수다. 고희(古稀)를 넘긴 사람들도 있으나 4~50대 젊은 여성들이 더 많다. 그들은 대개 차양(遮陽)이 넓은 모자를 쓰고, 가면을 쓰듯 넓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다. 목까지 수건으로 둘러 온몸에 노출부분이 없다. 게다가 까만 안경까지 끼면 이방인처럼 보이고, 심술 사나운 도깨비같이 보인다. 호젓한 길에서 그런 사람을 만나면 성질 사나운 도깨비를 만난 듯 소름이 끼친다. 화가 잔뜩 난 사람처럼 말 한마디 없이 사납게 옷깃을 스치고 앞질러가는 가면 쓴 사람을 보면, 인정이라고는 쥐뿔만큼도 없이 냉정한 사람으로 보인다. 반면에 얼굴을 가리지 않은 젊은 여인을 만날 때면 친근감을 느낀다. 그들은 너나없이 미소 띤 얼굴로 인사를 한다. 땀방울이 송알송알 맺힌 정겨운 얼굴로 목례를 하거나, “어르신! 많이 불편해 보이는데 조심하세요.”라며 비켜가는 여인을 만날 때면, 천사를 만난 듯 마음까지 포근해 진다. 그러나 얼굴을 가린 가면은 예의도 인정도 삼켜버린 심술 사나운 마귀를 만난 것 같다.

나는 날마다 재활운동량을 조금씩 늘리고 있다. 처음 시작할 때 천 발자국도 힘겨웠는데, 한 발 한 발 늘리다 보니 지금은 칠천 발자국쯤 거뜬히 걷는다. 많이 발전한 셈이다.
입추(立秋)와 말복(末伏)이 지나고 매미들의 합창이 온 산을 마구 흔들어대던 날, 나는 산길을 걷고 있었다. 가면 쓴 두 여인이 내 옷깃을 스쳐가면서 주고받는 말이 들렸다.
“아니야, 이 사람아! 그분일리 없어.”
“이 사람아, 그분이 틀림없다니까, 그러네.”
그러면서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씽씽 앞질러 갔다. 나 보기에도 그들이 낯익은 뒷모습이었다. 20년 전으로 마음이 돌아갔다. 맞아! 이 여사와 박 여사가 틀림없었다. 나는 그분들과 안부인사라도 나누려고 기를 쓰고 따라갔으나 거리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었다.

친밀하게 지내던 사람과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반가운 일도 없다. 앞서간 두 여인은 나와 절친한 사이였다. 만나 정담이라도 나누고 싶었는데, 아쉬움을 안고 터덕터덕 걸었다. 쉼터 정자에 이르렀다. 기다리던 두 여인이 가면을 벗어던지고 달려와 내 손을 덥석 잡아주었다. 하마터면 그놈의 가면 때문에 반가운 사람들과 정겨운 만남을 놓칠 번했다.

두 여인은, 내가 삼성특수제지에서 전무로 일할 때 선별부에서 일하던 사원들이었다. 시간만 되면 퇴근을 서두르는 사람들과는 달리 그들은 책임량을 모두 감당하려는 성실성이 보여 마음에 담아둔 사원들이었다. 그 뒤 21년의 세월이 지났으니 잊어버릴 법도 한데 그들이나 나나 땀 흘려 일하던 옛정이 그리워 잊혀 지지 않았나 보다. 40대 후반의 팔팔하던 젊음은 어디로 가고 어느새 고희를 앞둔 할머니들이 되었다. 21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세상사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훈훈한 정을 나눴다. 두 여인은 동갑내로 자매처럼 정겹게 사는 여인들이다. 아직도 고운 얼굴이니 가면을 쓰지 말고 산행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산책이나 산행에서 햇빛을 많이 받으면 항암효과와 수면효과가 있다는 의학계의 발표가 있다고도 말해 주었다. 오랜 시간 정담을 끝으로 두 여인은 가면을 벗어 가방에 넣고 미소 띤 얼굴로 걸어가고 있었다.

가면을 쓰듯 얼굴과 전신을 가리고 산행하는 것은, 건강관리에 적신호라는 생각이 든다. 탱글탱글하고 건강미 넘치는 몸매, 땀방울이 송알송알 맺힌 화사한 얼굴에 미소를 띠며 걸어가는 여인을 바라보면 정이 철철 넘치고 아름답게 보인다.
(2010. 8.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