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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박경숙
ㆍ작성일	2010-09-17 (금)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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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크아웃 문화
테이크아웃 문화

전북대 평생교육원 수필 창작 목요 야간반 박경숙

담배를 꺼내 물고 객석의 빈곳을 향해 쓰윽 한 번 훑어 보더니 조용히 무대 구석자리에 앉는 연극인 조재현, 순간 극장의 모든 불이 꺼지고 희미한 담배 연기와 함께 한 줄기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그(마틴 다이사트役)가 우릴 향해 말(言)을 꺼내며 연극 에쿠스는 시작되었다. 술렁이던 좌중도 이내 숨을 죽인 채 앉아서 현대인의 적나라한 삶과 욕망을 훔쳐보며 마틴의 일거수일투족에 빨려 들어갔다.

지난겨울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대학 삼총사가 서울에서 모였다. 오랜만에 얼굴도 보고 밀린 애기로 세모(歲暮)를 뜻깊게 보내자며 결혼하고 20년 만에 의기투합된 만남이었다. 셋 중 그 둘은 전주에 살고 있다. 그러나 전업주부인 나와는 대조적으로 바쁜 직장인 친구와의 만남이 그리 수월하진 않았다. 여자들이 결혼해서 살다보면 다 그런 건가 하는 생각이 미쳐 내가 먼저 모임을 주선했고, 친구들 몰래 연극 티켓도 미리 예약해 두었다. 친구들은 오랜만에 맛보는 휴식과 색다른 경험에 들떠 모처럼 좋은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라도 드릴 자세였다. 그러나 평소 ‘나쁜 남자’를 보고 싶었던 나는 오히려 그 날을 좋은 기회로 잡았다. 태고의 순수와 동물적 향취를 간직한 채 야릇한 에로티시즘까지 느끼게 하는 목마름 때문일까. 연극은 물 흐르듯 지나갔고 에쿠스로 등장하는 신체 건장한 젊은이들이 사진 촬영도 허락하며 팬 서비스도 훌륭했다.

연극이 끝난 뒤 얘기도 나눌 겸 거리로 나온 우리는 신호등을 사이에 두고 넥타이를 맨 흰 셔츠 차림의 직장인들과 마주쳤다.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거리는 물론 지하도를 가득 메운 도시의 군상들. 그들은 마치 치열한 생존경쟁의 한 가운데서 외롭고 무료하게 서성이는 알란(에쿠스의 소년)을 떠올리게 했다. 늘 시간에 쫓기듯 새벽부터 밤까지 매일매일 반복되는 삶을 살아가지만 누구 한 사람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바쁜 점심식사를 마친 그네들의 손엔 어김없이 커핏잔이 들려 있었다. 정말 커피를 좋아해서 매일 마시는 걸까, 아니면 중독이 되어 습관적으로 선택한 행동일까. 커피에 흠뻑 빠진 도회인, 그것은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다. 희한한 건 커핏값이 밥값보다 비싼 세상이다. 그래도 커피 한 잔 정도는 마셔야 업무를 시작할 수 있는 통과의례처럼 인식되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소위 테이크아웃으로 통용되는 커피숍 문화이다. 테이크아웃은 많은 사람이 최대한 빠르게 세계화, 정보화로 가는 현대사회의 시간절약 차원에서는 큰 장점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젊은이들 사이에선 이미 다양하고 독특한 맛과 그들의 취향에 맞는 디자인과 그들만의 문화로 자리 잡아 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친구가 데리고 간 테이크아웃의 대표점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가공할만한 소음으로 시장통과 진배없었다. 도무지 조용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만남의 장소라는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린 셈이다. 자리를 펴고 앉아 음악에 열중하는 사람, 시끄러운 무리 속에서 무료하게 한담(閑談)을 나누는 그런 분위기만 존재했다. 서구의 세련된 문화의 향유와 친교의 장소가 아니라 쾌락의 소비만 거품처럼 넘쳐나는 듯 보일 뿐이었다.

테이크아웃 본래의 뜻은 이렇다. 다음 베이스를 향해 달려가던 주자가 수비수를 가로막고 수비의 송구 동작을 방해하는 행위. 그러므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다른 데서 먹을 수 있게 음식을 파는 상점은 ‘take away’가 더 맞는 말일 거다. 더욱이 요즘엔 테이크아웃 커피와 비슷하게 도심의 양조장에서 갓빚은 막걸리를 사서 마실 수 있는 테이크아웃 막걸리도 등장했다고 한다. 젊은 시절 텁텁한 막걸리 한 잔을 앞에 두고 푸짐한 안주와 인심 좋은 주모의 너스레를 느껴 본 사람이라면 어디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그러나 문제는 이런 변화가 바로 우리 문화의 서양화과정 중 하나라는 점이다. 혹자들은 글로벌 시대에 살면서 우리 것과 남의 것을 구분할 필요가 있겠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인의 정체성 못지않게 사회와 민족의 정체성을 규정할 때 ‘문화’는 그 무엇보다 가장 큰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문화란 인류에게서만 볼 수 있는 정수라고 말한다. 그러기에 대단히 크고 도회적으로 멋진 장소와 서구의 세련이 문화가 아니다. 그렇듯 멋진 장소를 잘 활용할 줄 아는 사람들의 교양 있는 태도가 문화일 것이다.

시끄러운 잡음을 피해 도망치듯 나무와 숲이 보이는 한적한 장소에서 친구들과 마주 앉았다. 무상한 세월 탓으로 얼굴에 주름까지 그려진 친구들이 아직도 스무 살 앳된 모습으로 기억되는 건 무슨 까닭일까. 그네들의 목소리가 아름다운 운율처럼 귓가에 또렷이 들렸다. 우리는 그곳에서 우리만의 암호로 애기하고 서로의 눈빛을 반짝였다. 과거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나는 어린아이가 된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 에 나오는 말이다. 짧지만 편리란 삶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무한한 자유를 만끽하는 순간이었다.

영화의 최종 편집과정에서 잘려나간 필름을 일컫는 용어가 있다. 아웃 테이크다. 촬영과정에서 엔지(NG)로 쓸 수 없게 된 필름으로 편집자의 의도에 따라 잘려 나간 필름을 말한다. 우리 삶에서 부득이 잘라내고 싶은 장면은 무엇이었을까. 아마 셀 수 없이 많을 지도 모른다. 순간이었지만, 친구들과 보냈던 우리의 소중한 그날 하루 중, 테이크아웃 점에 들른 시간만이길 마음속으로 빌어 본다.

(2010. 09.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