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례 운조루(雲鳥樓) 공식 홈페이지 ▒

ㆍ작성자	최정순
ㆍ작성일	2010-09-30 (목) 17:56

ㆍ추천: 0 ㆍ조회: 3182

어머니 같은 아버지(3)
어머니 같은 아버지(3)
- 병아리 -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최정순

해마다 3월쯤이면 우리 집 마당에는 햇병아리로 그득했다. 아버지는 싱글벙글하시며 좁쌀모이와 축이 낮은 물그릇이랑 싸릿대로 엮은 어까리를 챙기셨다. 그리고는 허술한 수챗구멍과 강아지가 들락거리는 담장 밑 개구멍까지도 짚 뭉치로 틀어막곤 하셨다.

내 어린 시절만 해도 시골에서 가용 돈 마련이나 식구들 보양식 감으로는 닭만 한 게 없었다. 그러다보니 정월이 되면 이 집 저 집 할 것 없이 병아리를 깼지만 사료를 구입해서 기른다는 것은 엄두도 못 냈다. 그러니 방목 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인가는 별스런 일도 다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병아리 머리에 빨간색 물감이 칠해져 있지 않는가. 놓아먹이자니 옆집 병아리와 구분하려고 아버지가 꾀를 내신 것이었다.

한 배에서 태어난 병아리수가 모두 스물한 마리나 되었다. 아버지는 허실 없이 키워야 한다며 암컷을 퍽이나 선호하셨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씀이 요놈들을 여섯 달만 잘 키우면 알을 낳을 것이고, 그러면 딸내미가 사달라는 별표 운동화랑 크레용도 사줄 수가 있다고 하시는 거였다. 검정 고무신만 신었던 나는 운동화를 사준다는 말에 병아리를 정성껏 돌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우선 병아리부터 찾았다. 꼬리를 치며 나를 반기는 강아지는 뒷전이고 병아리가 보이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입술을 앞쪽으로 쭉 빼고서 구~~구~구를 외치며 텃밭을 돌아 헛간 거름자리를 거쳐 소매통이 놓인 변소까지 집 안팎을 샅샅이 뒤졌다. 허겁지겁 한참 구~구~구를 외치다보면 나중에는 입술이 얼얼해져 헛바람만 나왔다. 걱정이 되어 하늘만 바라보고 있을 때 엉뚱하게도 뒷집 대밭 속에서 어미닭의 꼬꼬댁하는 소리와 함께 삐악거리며 따라오는 병아리를 보면, 반가운 마음에 앞서 나도 모르게 화가 나서 고무신짝을 집어 던지기도 했었다.

먹이가 많은 대숲은 족제비나 들고양이들이 득실대는 곳이라서 행여 잡혀 먹힌 병아리는 없는지 어까리 속에 가두면서 세어보고 또 세어보곤 했었다. 이렇게 돌보는데도 병아리 수는 차츰차츰 줄어 열세 마리밖에 남지 않았다. 앞으로 몇 마리가 더 줄어들지, 어른들 말로는 공중에 솔개가 나타나면 어찌나 그 기세가 사납던지 갓난 애기도 낚아채갈 정도였다던데 병아리쯤이야······, 솔개가 아니라도 병아리를 위협하는 적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한 번은 소매통에 빠진 병아리를 건져 목욕을 시켜서 솜으로 둘둘 말아 아랫목에 묻어 두었지만 시들시들 오줌독으로 죽고 말았다.

알에서 깬지 3~4개월쯤 자라면 중병아리(약병아리)라 했고, 6개월이면 암탉은 알을 낳게 되었다. 여러 마리가 갈갈대며 알자리를 찾는 풍경은 오히려 집안 분위기를 풍성하게 했었다. 내가 유년기를 보내고 소년기에 접어들었듯이 병아리들은 아직 약병아리나 다름없는 나와 함께 커갔다.

3~4개월이 지나자 내 눈으로도 자웅(♂♀)을 구별 할 수가 있었다. 암탉과 달리 수컷은 다리가 길고 꺼벙했지만 벼슬이 돋고 혈기가 넘쳐 눈도 불그스레 번쩍거렸다. 가끔 목을 하늘로 쳐들고는 발성이 덜된 성대로‘꼬끼오’소리도 제법 질러댔다.“나는 왕이다!”라고 외치는 것일까.
수컷들의 싸움은 갈수록 치열했다. 암컷과 부하들을 거느리고 싶은 자리다툼이었을 게다.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는 부리를 맞대고 눈을 째리며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날개를 활짝 펴고는 모둠발로 껑충껑충 뛰면서 가슴 치기를 해댔다. 털이 빠지고 피가 나도록 상대방을 아무데나 마구 쪼아대며 싸웠다. 그러다가 어느 한 쪽이 날개를 서서히 접으며 눈꺼풀을 내리깔고는 모이를 찾는 척 고개를 갸웃거리며 슬슬 피해 버리면 한 바탕 싸움은 끝났다. 그뿐인가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고 파헤쳤다. 심지어 부뚜막에 놓인 소금이며 간장까지도 찍어 맛 볼 정도였으니 말이다.
사춘기적 반항이라더니 금방 청소한 마루에다 배설을 해대고 발자국 동양화까지 그려놓곤 했었다. 툭하면 담을 넘어 마당에 널어놓은 곡식이며 채전에 손을 댔다가 주인마님한테 들켜 장대로 두들겨 맞고 도망쳐오기 일쑤였다. 나는 이런 닭들을 보면서 안쓰러워 모이를 주기도 했었다. 어미닭도 이 무렵이면 젖떼기라도 하듯이 새끼들을 죽지 않을 만큼 마구 쪼아댔다. 그래도 새끼들은 그러려니 하면서 스스로 먹이를 찾으며 커갔다.

사실 나도 병아리가 아니던가. 고추잠자리가 날 무렵 볼그족족하게 익어가 는 대추를 보면 어찌나 달콤하게 보였던지, 아침 일찍 골목집 대추나무 밑을 서성였던 일이며 벌집이 달린 줄도 모르고 나뭇가지를 흔들다가 벌은 그만두고 주인할아버지의 헛기침소리에 놀라 신발짝이 벗겨진 줄도 모르고 줄 행낭을 치지 않았던가. 그날 밤 벗겨진 신발짝 하나 때문에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다 날이 밝았다. 아니나 다를까. 날이 밝자“최 생원 계신가?”하는 골목집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무서워서 떨었건만 지금은 왜 이리도 그리움으로만 밀려오는지······.

“여섯 달만 잘 키우면 알을 낳을 것이고, 그러면 운동화와 크레용도 사줄 수가 있지!”하신 아버지의 말씀은 내 어린 시절 병아리와 함께 자라면서 머릿속에 깊이 새겨진 나의 희망이었다. 병아리는 자라서 어미닭이 되어 어김없이 알을 낳았으니까…….

(2010년 9월 20일 추석 무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