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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이애란
ㆍ작성일	2010-12-15 (수)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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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울리기
어울리기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이애란

난 새로운 사람을 사귀고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일단 내 사람이라 생각하면 아주 오랫동안 변함이 없다. 이런 성격이 물건 하나를 사거나 버리는 데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가구 하나를 사더라도 생각을 많이 하고 사지만 한 번 집안에 들여놓은 가구들은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바꾸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집에 있는 가구들은 거의가 다 수 십년을 나와 함께 하고 있다. 집에 있는 물건 중 가장 오래된 건 초등학교 때부터 가지고 있는 피아노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을 때 날 위해 사준 엄마의 마음이 느껴져서 애착이 많이 간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무렵부터 사용한 침대는 아들이 대학생이 되어 서울로 가게 될 때까지 대를 넘겨 사용하였다. 지금도 그 침대는 아들 방에 있어서 가끔 내려오는 아들이 편히 쉬어가기도 한다. 두 번이나 천 갈이를 하면서도 버리지 않고 사용하는 이십년 가까이 된 소파는 또 찢겨져서 천 갈이를 기다리고 있다. 수 년 전 새 아파트로 이사를 하면서도 낡은 가구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았다. 새 아파트 분위기에 맞지 않는다고 멀쩡한 가구들을 다 버리고 새로 산다는 데 난 그러지 못했다.
우리 집에 와본 친구들은 고가구 전시장 같다고 한다. 약간 장난기가 섞인 그 말 속에는 지나치게 검소한 게 아니냐는 타박도 조금은 들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오랜 세월 나와 함께 해온 그 가구들은 오랜 친구처럼 정겨워서 버리고 싶은 마음이 없다. 게다가 새 아파트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직도 사용할 수 있는 물건들을 마구 버린다면 너무 큰 낭비가 아닐까 싶다. 때로는 소비가 더 큰 경제 발전에 기여한다지만 넘쳐나는 쓰레기를 감당하는 것도 문제가 아닐까?
처음엔 오랜 가구들이 새 아파트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지만 얼마간 지나다보니 그런대로 괜찮아 보였다. 지금껏 비슷한 시간을 같이 어울려왔기 때문에 서로 서먹하지 않았다. 사람도 오랜 세월 나와 함께 나이 들어가는 친구가 좋은 것처럼 가구들도 저마다의 세월을 자랑하며 같이 낡아가는 것도 나빠 보이지만은 않았다. 오래된 가구들은 오래된 친구처럼 편하다.
얼마 전 우리 집에 새로운 친구가 들어왔다. 20년 가까이 함께한 투박하고 커다란 TV가 날렵하고 세련된 벽걸이TV에 밀리고 말았다. 이사할 때 버리지 않았다고 주변의 타박을 제일 많이 받은 친구인데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어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야 했다. 그런데 새 TV는 생각보다 좋았다. 큰 화면과 날렵한 모양새는 요즘의 젊은 뮤지션들의 날씬하고 세련된 모양새와 비슷했고, 고급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는 음악회에 가지 않아도 충분히 감동이 살아날 정도였다. 이제는 TV의 원래 역할인 뉴스나 드라마를 보는 것뿐 아니라 음악방송을 틀어놓고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손때 묻은 낡은 TV를 내보낼 때의 아쉬운 마음을 새 친구가 새로운 정으로 채워 주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TV주변에서 잘 어울렸던, 결혼 때부터 가지고 있던 예쁜 칠보장이 너무 예스러워 보였다. 육중한 TV를 힘 좋게 떠받치고 있던 장식장은 날씬하고 예쁜 TV와 어울리지 않았다. 심지어 내 몸을 편안하게 감싸주는 것 같은 소파까지도 낡고 찢어져 있어서 볼썽사나웠다. 난 내 소파의 낡은 모습까지도 좋아서 새것을 사지 않았다. 그런데 새로 들어온 TV 하나 때문에 그동안 정들였던 옛 친구들의 낡은 모습들이 눈에 거슬렸다. 오랜 가구들은 텃세를 부리며 새 TV와 어울리기를 거부하고 새 TV는 오랜 가구들을 무시하며 서로 도도하게 콧대를 세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새로운 것과 오래 된 것이 어우러지기까지 필요한 것은 결국 시간이었다. TV 주변의 다른 소품들을 이리저리 바꿔가며 며칠을 보내고 나니 낡은 가구와 새 TV가 어울려 보이기 시작했다. 오래된 가구와 새 TV가 서로의 모습을 더 빛내주고 있었다. 오래된 가구는 중후한 무게감과 고풍스러운 자태로, 새 TV는 고가구와 어울려 더욱 세련된 모습으로 잘 어울려 보였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이는 것 같다.
새로운 물건 하나의 어울림도 이렇게 시간이 필요한데 하물며 사람끼리는 어떨까.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을 편안해하고 좋아한다. 혈연, 지연, 학연 등 여러 가지 고리를 만들어 서로 의지한다. 그런 고리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편안해서 좋은 친구가 될 것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때로는 그 고리가 너무 단단해서 새로운 사람이나 문화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기도 한다. 조금만 시간과 마음을 들인다면 더욱 좋은 만남의 인연을 갖게 될 것이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상대를 배척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될 일이다. 새로운 만남을 받아들이려면 여유를 갖고 아름다운 어울림을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그러면 좀 더 풍요로운 삶이 되리라 믿는다.

(2010.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