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례 운조루(雲鳥樓) 공식 홈페이지 ▒

ㆍ작성자	김소영
ㆍ작성일	2011-01-15 (토) 04:32

ㆍ추천: 0 ㆍ조회: 2208

마음에 쓰는 일기
마음에 쓰는 일기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김소영

학원 수업이 모두 끝나는 늦은 밤에 나는 행복한 퇴근을 한다. 그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전화벨이 울린다. 아이들은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고 하고, 남편은 보고 싶으니 빨리 오라고 장난스레 속삭인다. 날마다 달라지는 주문을 받기 위해 내가 먼저 전화를 하기도 한다. 가족들이 집에 돌아와 편안한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나면 내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진다. 밤늦도록 부산한 주변 상가와 사람들을 지나치면서 난 편안한 마음으로 하루를 마음속에 그려본다. 집으로 걸어가면서 마음 밭에 일기를 쓴다.

대학에 갓 입학한 새내기였을 때, 엄격하고 학점을 짜게 주기로 소문난 외국인 교수님 한 분이 특별한 과제를 내주셨다. 하루 중 틈틈이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었다. 때로는 강의가 시작되기 직전에 서둘러 공책을 꺼내 한두 줄씩 마음속에 떠오르는 대로 서툰 영어로 기록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 일이 좋아졌다. 그래서 틈이 날 때마다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어 두었다. 학점과 관계가 있거나 엄격하게 검사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계속해서 내 마음을 적어나갔다. 아주 가끔 내가 썼나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표현이 살아 있었다. 힘이 들 때마다 한두 줄씩 마음을 풀어 놓으면 다시 한 번 기운을 낼 수 있는 힘이 솟았다. 그렇게 학기가 마무리되고 나의 일기쓰기는 공책이 아닌 마음속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오전 수업이 끝나면 학생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흰 가운을 입고 학생들이 점심을 먹고 떠난 자리를 정돈하고 빈 그릇을 치우는 일이었다. 강의가 없는 빈 시간이나 오후수업이 끝나면 학교 도서관에서 일했다.

내가 다니던 대학에는 학생들이 자유롭게 보고 싶은 책들을 직접 찾아서 읽고 공부할 수 있는 개가식 도서관이 있었다. 책들을 모아 다시 제 자리에 꽂아서 정리하고 대출 반납을 처리하는 일들은 아르바이트 학생들이 도맡아 했다. 과외가 금지되던 시절이어서 학생으로서 얻을 수 있는 좋은 일자리였다. 경력이 쌓이면 보수도 올라갔다. 그렇게 돈을 모으면 분납이 가능하던 한 학기 등록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공부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지만 일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시골에서 동생들 뒷바라지만으로도 힘겨우실 부모님께 용돈이며 학비를 보내달라는 전화를 차마 하지 못했다.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은 내게 버거운 날이었다. 외국인 교수님과의 면담은 진땀이 날 정도로 긴장되었다. 그런 날은 일부러 주택가 골목으로 난 지름길을 걸어서 집으로 갔다. 더부살이하던 고모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표현을 고쳐보고 실수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그 교수님과 다시 면담을 했다. 내친 김에 영어로 일기를 썼다. 아침부터 일어났던 모든 일을 거리낌 없이 마음속에 적어 보았다. 아무도 내 부족한 영어실력을 흉보지 않았다. 그 순간만큼은 어느 누구보다 유창하게 영어를 쓸 수 있었다. 그러면 다시 위로가 되고 뿌듯해졌다.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겠다는 용기가 생겼다.

점점 말보다는 생각이 더 많아졌다. 내 몸은 늘 생각과 더불어 움직였다. 일하면서 생각하고 또한 생각하면서 일했다. 차곡차곡 마음에 가득 쌓이는 것들을 차마 말로 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차라리 혼자가 편했다.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고 전달할 여유가 없었다. 날이 갈수록 내 마음속의 일기장은 두꺼워져 갔다. 어느 날 도서관 한 귀퉁이에 앉아 졸고 있을 때 어떤 선배가 살며시 커피 한 잔을 전해주었다.

“쉬면서 해요.”

겉보기엔 씩씩하고 평온하던 내 마음에 작은 물결이 일었다. 날 지켜보는 눈길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생각해보니 수업을 마치고 강의실을 나오는 길에 도서관을 향해 무심코 시선을 돌리면 그 선배의 모습이 보였다. 강의실을 향해 계단을 오르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또 다른 계단으로 이어지는 통로의 창틀에 기대어 그 선배가 서 있었다. 그 선배는 말없이 내 마음을 읽어주고 있었다. 마음이 따뜻하게 젖어왔지만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냥 마음속의 일기장에만 고마움을 적었다.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읽어주는 따뜻한 사람이 있음을 그때 처음 알았다.

고향에 돌아와 갓 문을 연 신문사의 수습 편집기자로 일하게 되었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일요일 낮에 이름만 알던 한 취재 기자의 전화를 받았다. 한가하면 나와서 다른 기자들이랑 함께 시간을 보내자는 전화였다. 겨울이었고 저녁 무렵이 되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사람들과의 교류에는 도통 숙맥인 내가 일행에게 즐거운 사람일리 없는데도 불편하지 않았다. 지나칠 정도로 말이 없는 내 옆에서 그는 자연스럽게 내 어색함을 덜어 주었다.

난 사람들이 모이면 즐겁게 대화하고 맞장구치고 웃고 떠들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모임이 늘 불편했었다. 그러던 내가 막걸리도 마시고 노래도 불렀다. 어색하고 쑥스러웠지만 그 사람이 옆에 있어 든든했다. 말이 없어도 편안할 수 있다는 걸 처음 느꼈다. 가로수 불빛 아래 눈발이 흩날리는 겨울 밤길을 말없이 걸어도 그는 날 불편해하지 않았다. 내 침묵을 깨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난생 처음 낯선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도 마음속에 글을 쓸 수 있었다. 남편은 나에게 그렇게 다가와 주었다.

창간호 발행 준비가 끝나고 기자들 모두가 나름의 소감을 적어 한 쪽 지면을 채웠다. 나 역시 그 특별한 순간을 맞으며 몇 줄의 소회를 적었다. 내용이 기억나진 않지만 그런대로 괜찮았던지 지면의 맨 위쪽에 실리게 되었다. 한참 뒤 어느 날 함께 길을 걷다가 남편이 불쑥 말했다.

“작가가 되세요.”

나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남편은 잘 썼다는 칭찬을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음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마치 마음 속 깊은 곳에 감추어두고 혼자서만 몰래 들추어보던 어떤 것을 들켜버린 심정이었다.

그랬다. 언젠가 꿈을 꾸듯 일기를 쓴 적이 있었다. 나도 배우자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자라면 참 좋겠고, 내 이름 앞에 작가라는 두 글자가 보태어지면 행복하겠다고.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명히 한 가지는 내 현실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꿈이었다. 나는 신문사 수습기자였으니까.

그러나 나는 또 하나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여전히 마음속에 일기를 쓰고 내 꿈을 펼쳐놓고 있었다. 그런 내 마음을, 내 꿈을 알아챈 남편이 아주 특별한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1년 뒤, 나는 신문사를 그만 두어야 했다. 편집부에서 시작된 경영진과의 갈등으로 편집부원 전원이 해고되었다. 그리고 나는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얼마 뒤 남편도 신문사를 그만두었다. 말 그대로 실업자인 남편과의 가난하고 막막한 연애시절을 견뎌야 했다. 우린 가난했고 둘 다 가난하면 안 된다며 말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꿈처럼 고등학교 영어교사가 되었다.

나는 이제 마음속에 쓰는 일기가 어느 날 꿈이 이루어지듯 내 앞에 펼쳐진다는 것을 믿는다. 아직도 나는 하얀 종이 같은 밋밋한 마음을 마주하고 시도 때도 없이 이런 저런 생각들을 적어나가곤 한다. 그러다가 때로는 사람들과 인사하는 것도 놓칠 때가 있다. 마음으로는 얘기하고 말하기를 잊을 때도 많다. 그래도 누군가는 그 마음을 읽어주고 있을 것 같다. 그리고는 살며시 그 따뜻한 마음으로 커피 한 잔을 전해 주듯 내 마음을 다독여 줄 것만 같다.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다며 소리 없이 내 꿈을 응원해 줄 것만 같다. 마흔의 중반을 넘은 이제야 나 또한 그렇게 누군가의 마음을 따뜻하게 읽어주고 보듬어 줄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로 인해 누군가가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이제는 그렇게 살고 싶다고 마음에 일기를 쓴다.

(2011. 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