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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이애란
ㆍ작성일	2011-01-07 (금)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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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 고맙다
딸아, 고맙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수요반 이애란

내가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였다. 수업시간마다 새로운 선생님이 우리를 가르치러 들어오셨다. 초등학교 때는 한 선생님과 종일 수업을 했는데 과목마다 다른 선생님을 만나는 게 새로웠다. 처음 수학 선생님을 만나던 날, 난 예쁜 수학 선생님을 첫 눈에 좋아하게 됐다. 선생님도 날 처음부터 예쁘게 봐주셨고 1년 내내 내게 관심을 가져 주셨다. 무엇이든지 그리는 대로 그려질 하얀 도화지 같았던 어린 시절이었다.

수학 선생님과의 만남은 내가 수학을 잘하는 아이가 되게 해주었다. 외딸이었던 선생님은 역시 외딸인 날 친 동생처럼 아껴주셨고 자매의 연을 맺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숫기 없었던 나는 선생님을 언니라 불러보진 못했지만 친 언니 같은 정을 나누었다. 선생님의 모습을 닮아가던 나는 자연스럽게 수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나도 수학 선생이 되어 나의 모습을 닮은 제자를 키우고 싶었다. 시간이 흐른 뒤, 나는 대학에서 수학 강의를 하게 되었다. 중학생 제자를 두지는 못했지만 나의 선생님을 닮은 정 많은 선생이 되려고 노력했다. 내게 수학은 어렵다거나 노력해서 얻어내야 할 과제가 아닌 어린 시절의 기분 좋은 추억이었다.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수학이 많은 아이들을 힘들게 하는 과목이란 걸 알았다. 그래서일까. 교육열이 높은 요즘 부모들은 중학생인 아이들에게 고등학교 수학을 가르치기도 한다. 나는 나이에 맞지 않는 수학 교육은 흥미를 떨어뜨려 오히려 공부에 취미를 잃게 된다고 확신한다. 게다가 내 아이들인데 수학을 못 할 리 없다는 약간의 오만도 있었던 것 같다. 난 아이들이 어렸을 때 학교 공부외의 공부는 시키지 않았다. 그 대신 올바른 인성을 갖는 데 필요할 거란 생각에 글 읽기나 체육 활동, 음악 교육을 시켰다. 공부는 아이들이 자라서 스스로 하는 거라 믿었다.

그런데 내 아이들은 다른 과목에 비해 둘 다 수학을 힘들어했다. 큰 아이는 결국 수학을 극복하지 못한 채 대학에 갔다. 다시는 수학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지 않아도 되는 게 좋다고 했다. 자기 꿈과는 전혀 상관없는 수학 때문에 마음이 많이 상했던 모양이다. 큰 아이의 경험으로 작은 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수학을 가르치리라 마음먹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어린 나이 때부터 수학 공부를 시켜야 하는 게 한 번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옳지 않게 느껴졌다.

수학을 전공한 엄마를 둔 딸에게 수학은 틈이고 상처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벌어지기 시작한 틈이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점점 더 커졌다. 다른 친구들은 벌써 다음 학년 진도를 나가고 있는데 딸아이는 수업 진도조차 따라가기 힘들어했다. 한참 앞서가는 친구들의 수학책을 보며 조바심을 내기도 했다. 수학을 잘했던 친구들은 딸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했다. 내 확신에도 불구하고 어릴 때 선수 학습을 시킬 걸 그랬나 싶은 마음이 들 때가 많았다. 하지만 난 일찍 진도를 나가도 중·고등학교에서 배우는 수업의 양은 같다고 위로했다. 천천히 그리고 열심히 한다면 먼저 많이 배운 친구들이나 같은 수준에 도달할 거라 말해 주었다. 다른 사람 상관하지 말고 차근차근 쌓아가다 보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도 말해 주었다. 그 뒤로 오랫동안 딸은 열심히 공부를 했지만 수학은 여전히 딸을 힘들게 했다. 종일 수학 책을 붙들고 있는데 왜 성적이 오르지 않느냐는 친구들의 걱정과 위로는 딸에게 오히려 상처를 남겼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딸아이는 다시 힘을 내서 열심히 공부했다.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지 못한 새들은 날지 못한다 했던가. 작은 새가 혼자서 힘겹게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을 지켜보는 어미 새의 안타까운 마음으로 보낸 날들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낸 뒤 딸은 어느덧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지난 가을 학기부터 딸아이가 수학이 조금 쉬워졌다는 말을 했다. 나는 수학이 쉬워지기 위한 공부의 양이 다 찼나보다고 말해주었다. 오랜 시간 동안 수학을 못하는 아이라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실력이 좋아졌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기말 시험 때도 아주 편하게 시험을 치렀지만 시험 문제가 쉽게 출제되었다고만 말했다. 그런 딸이 며칠 전에 치른 모의고사 성적표를 가져왔다. 수학 성적 표준점수가 아주 좋게 나왔다. 성적표를 받아보고 나서야 딸은 자기가 수학을 더 이상 못하는 아이가 아니란 걸 인정했다. 드디어 수학의 상처에서 벗어난 것이다.

딸은 좋은 수학 점수를 얻은 것만이 아니었다. 수학을 통해서 겸손을 배웠다. 이제는 수학을 잘하게 되었지만 자기가 못하는 사람이었을 때의 마음을 잘 안다. 그래서 공부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친구들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수학을 통해서 딸아이는 성실함을 배웠다. 노력해서 안 될 지라도 쉽게 포기하지 않아야 하는 사실을 배웠고, 계속 노력하다 보면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상처를 가지고 산다. 경제적 결핍이나 지적 결핍처럼 눈에 보이는 것뿐 아니라 내면의 결핍 때문에 가슴앓이를 한다. 노력하면 치유할 수 있는 상처도 있지만 노력해도 치유하기 힘든 상처도 많을 것이다. 누구나 부족함 없는 삶을 꿈꾸지만 아무런 결핍이 없다면 그 사람은 성숙된 인격을 갖추기 힘들지 않을까. 많은 상처들이 아물고 또 아물어 굳은살이 되어서야 사회적 성숙과 인격적 성숙을 이루게 된다고 믿는다.

딸이 처음부터 뭐든지 잘하는 아이였다면 결코 배울 수 없는 넉넉한 마음을 수학을 통해서 배웠을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수학 때문에 받은 상처는 아주 작은 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수학을 극복해 가면서 얻은 경험이 어려운 일에 부딪혔을 때 성숙한 생각과 행동을 하는데 좋은 밑거름이 되려니 싶다. 상처를 스스로 극복하고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는 딸아이가 고맙다.

(20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