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례 운조루(雲鳥樓) 공식 홈페이지 ▒

ㆍ작성자	정남숙
ㆍ작성일	2015-11-15 (일) 18:09

ㆍ추천: 0 ㆍ조회: 3366

홍시
홍시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정남숙

신선한 바람과 따스한 햇살 속에서 가을이 익어간다. 봄여름가을동안 모진 고난을 거친 자연은 추운 겨울을 준비하라고 많은 오곡백과를 선물하고 있다. 아니 겨울동안 외롭거나 쓸쓸하지 않도록 풍성한 열매를 가져다 주고 있다.
가을의 전령사 중 첫째는 역시 감이 아닌가 한다. 어딜 가나 감나무에 누런 감들이 주렁주렁 많이도 달려있다. 내 고향에는 감나무가 많다. 집집마다 집 주위 울타리근처에는 한두 그루씩의 감나무는 거의 다 있다. 추석부터 먹기 시작하는 게 감이다. 가을운동회와 소풍 때는 된장을 푼 뜨뜻한 물에 감을 담아 하룻밤 아랫목에 묻어두어 우린 감은 역시 더 없는 단골간식이었다. 초가을 높은 감나무에 달려있는 많은 감들 중, 붉은 홍시를 하나씩 가려서 장대로 따먹는다. 그 맛이란 말할 수 없이 좋다.
남편은 처갓집에 올 때마다, 어른들에게 인사하기가 바쁘게 뒤뜰 감나무를 찾았다. 매달린 홍시를 찾아 두리번거리며, 장대를 들고 하나씩 따먹는 그 맛이란 처갓집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그리움이라 했다. 한 겨울동안 사다리는 지붕에 기대고 서있다. 손님이 오거나 간식이 필요하면 언제나 꽁꽁 언 홍시를 꺼내다 주었다.
냉장고가 없는 그때엔 수수깡을 몇 군데 묶어, 지붕의 아래와 양옆 삼면을 꼬챙이로 박아놓고, 그 안에 추수가 끝난 늦가을 단단한 감을 따다가 저장한다. 이렇게 집집마다 지붕위에 얹혀놓은 단단한 감은, 겨울이 깊어질수록 먹기 좋은 홍시로 변했다. 겨우내 그 모습은 초가지붕과 어울려 장관을 이루어 농촌풍경의 대표적인 볼거리를 제공했다. 어느 긴긴 겨울밤 친구들과 밤새 놀다가, 심심하면 누구나 몰래 남의 집 지붕에 올라가 훔쳐 먹는 홍시는 더 달고 맛이 있었다.
어느 날, 밖에 나갔다 들어온 남편 손에 무언가 들려 있었는데 보이지 않았다. 궁금했지만 묻지 않고 며칠 지났는데 우연히 보니 베란다에 신문지로 덮여 있었다. 그 속에는 작은 홍시 한 상자가 들어있었다. 퇴근길에 홍시가 눈에 띄어 감을 좋아하는 나를 먹이려고 무조건 사가지고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막상 홍시를 주려고 보니 너무 작고 못난이 같아 미안해 감추어 두었다고 한다. 나는 남편의 마음에 감동하며 한입에 쏙 들어가니 더 맛있다며 먹으니 더 없이 기뻐했다. 언제부터인가 남편은 나보다 더 홍시를 좋아했다.
나는 가을이면 해마다 아무리 바빠도 친정에 갔다. 여러 가지 이유를 대지만, 그 중 하나는 단단한 감을 가지고 오려는 속셈이었다. 남편이 좋아하니 먹여주고 싶어 감을 가지러 간 것이다. 좀 늦게 가면 홍시가 되어 많이 가지고 올 수가 없으니 단단한 감을 가져오려고 때를 맞춰 일부러 친정엘 간다. 동생이 미리 따놓은 감을 큰 상자에 가득 담아, 싣고 올 수 있는 만큼 가져다가 베란다에 놓아둔다. 남편은 밤낮 없이 수시로 드나들며 홍시를 찾아 먹는다. 이렇게 실컷 먹을 수 있는 홍시를 때를 기다리면 언제나 친정에 가서 가져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좀처럼 사서 먹지는 않았다.
술과 담배를 좋아하지 않는 남편은 군것질을 즐겨 무엇이든 입맛 다실 것을 찾는다. 그러니 맛있는 홍시는 더할 수 없는 한겨울 간식이다. 나는 감을 뒤적여 밑에 있는 홍시를 찾아 맨 위쪽에 놓아둔다. 남편은 내가 가려놓은 것도 모르고 신기해한다. 어떻게 자기가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위에서부터 홍시가 되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내가 찾아 놓은 것인 줄 알면서도 일부러 모르는 척한 것 같다. 남편이 먹는 것만 봐도 맛이 있고, 남편이 먹을 홍시가 집안에 있는 것만 봐도 내 마음이 푸근해졌다. 같이 먹자고 건네주면 조금 전 먹었노라 사양하며 그 것마저도 남편에게 양보했다.
어김없이 가을이 돌아오니 어디를 가나 감나무에 감들이 주렁주렁 많이도 달려있다. 동생이 큰 상자 가득 감을 실어준다. 아빠를 닮아 감을 좋아하는 두 아들에게 택배로 보내고, 남은 것을 들고 들어와 몇 군데 나눠줄 곳을 찾아 몫몫이 담아놓았다. 단단한 것은 곶감을 깎아 매달아야지, 좋아하는 이가 가고 없으니 홍시를 봐도 욕심이 생기지 않는다. 풍성한 감들을 봐도 영혼 없는 감탄사로 ‘좋다’ 할 뿐이다. 홍시는 한두 개 먹는 것으로 충분하다. 많아서 무엇 하랴. 오래오래 옛 추억에 적어 살고 싶다.
(2015. 11.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