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궁리 5층 석탑을 보며
왕궁리(王宮里) 5층 석탑을 보며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최동명
나는 익산 왕궁리 유물전시관 주변에서 해질 무렵 왕궁리 5층 석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자동차 한 대가 주차하더니 어린이 4명과 여자 둘이서 황급히 탑 앞으로 갔다. 어린이 4명을 탑 앞에 일렬로 세우더니 사진을 찍고서는 바로 주차장으로 돌아갔다. 학교 숙제를 하는 모양이다. 어린이 하나가 왕궁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왕이 살던 곳이란다.”
그 이상 자세한 설명은 없었다.
나는 틈틈이 유명 박물관에 가서 전시물을 감상하기를 좋아한다. 부여박물관에 갔을 때다. 어린이들이 몇 명씩 모여서 관람하고 있었다. 동행하는 여자는 엄마인 듯하였다. 어린이들 손에는 노트와 필기도구가 들려 있었다. 어린이 한 명이 자기 엄마한테 무엇인가 물어본 모양이다. 부모는 오기 전에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는지 쪼그리고 앉아서 노트를 열심히 뒤적였다. 의문점을 찾지 못했는지 안내하는 분을 불러 어린이 앞에서 설명을 해달라고 부탁하고 아이들과 함께 열심히 들었다.
이곳 왕궁리는 백제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많이 나오는 역사의 현장이다. 왕궁리 5층석탑에서 발굴된 사리장엄 등 백제시대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 탑 주변에서 출토되었으며, 현재도 발굴중이다. 발견된 유물은 현재 왕궁리 유물전시관에 전시하고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어린이들에게 어디를 다녀와서 느낀 점을 적어내라고 과제를 주었을 때 어린이는 현장에서 많은 생각을 할 것이다. 탑 같으면 사람들은 왜 탑을 세웠는가, 탑 속에는 무엇을 넣어두었는지, 탑에다 절은 왜 하는지, 등 궁금한 점이 많을 것이다. 이럴 때 어린이의 지적 호기심과 상상력을 확대해주는 부모의 노력이 필요하리라.
왕궁리는 유물 유적 외에도 인간의 도리(道理)와 정(情)을 생각나게 하는 이야기도 있다. 이곳 왕궁리 출신 송영구라는 인물과 전주 객사의 글씨에 얽힌 이야기다.
전주를 풍패지향(豊沛之鄕)이라고 한다. 중국 한나라를 건국한 고조(유방)의 고향이 패군의 풍현이었던 데서 유래한다. 전주를‘풍패지향'이라 한 것도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본향이기 때문이다.
전주객사의 현판 글씨는‘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고 씌어져있다. 글씨 하나가 1m정도 된다.
송강 정철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서장관으로 따라갔던 익산 왕궁리출신 표옹 송영구는 북경 객사에 머물 때 중국인 청년 주지번과 인연을 맺었다. 객사에서 그 어렵다던‘남화경'을 외는 소리가 들려 나가보니 객사부엌에 불을 지피고 있는 청년이었다. 물어본즉 자기는 월나라 사람으로서 북경에 와서 과거를 준비하고 있다면서 과거도 낙방하고 노자마저 떨어져 객사에서 일을 해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주지번은 청년에게 조선의 과거시험지 작성요령을 알려주고 자기가 갖고 있던 책도 필사하여 주고 노자 돈마저 많이 주고 왔다고 한다.
주지번은 2년 뒤에 명나라 과거시험에 장원으로 합격했고, 1606년에 사신으로 조선에 오게 되었다. 명나라의 정사 사신이 송영구를 만나러 간다고 하자 조정에서는 거짓으로 송영구가 죽었다면서 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송영구와의 인연을 중히 여긴 주지번은 전주로 내려왔으며, 자신이 묵었던 전주객사의 현판을 써주었다고 한다. 몸이 쇠약한 송영구의 묘지자리도 잡아주어 그 자리가 현재 왕궁리에 있는 송영구의 묘라고 한다.
객사는 많은 학생들이 모이고 드나드는 곳이다. 풍패지관에 얽힌 이러한 이야기를 아는 학생과 모르는 학생은 생각과 행동이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사람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어려운 사람을 도우면 언젠가 내가 어려울 때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는 인생의 교훈을 얻게 될 것이다.
요즈음 우리 사회는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무한경쟁의 글로벌시대를 맞아 사회의 여러 부문에서 진통을 겪는다. 기러기 아빠, 실업과 자살, 이혼율증가 노인문제, 저 출산문제, 북한핵문제, 5년 내 백두산까지 폭발한다고 한다.
유치원에서부터 직장에 이르기까지 치열한 경쟁을 하다 보니 사회가 각박해졌다고 한다.
청소년 자살이 심각한 지경이라고 한다. 컴퓨터게임중독에 빠진 청소년들이 현실과 게임을 혼동하고 있다. 몇 년 전에 군부대에서 일어난 총기 사건으로 많은 군인들이 목숨을 잃은 일이 있었다. 컴퓨터게임중독에서 오는 사회병리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이 계속 방송되자 어떤 초등학교 어린이가 자기 아빠에게“대장이나 국회의원이 죽는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방송에서 떠드는 거야?”하고 물었다고 한다. 요즈음 컴퓨터게임중독 어린이들이 느끼는 공통적인 현실인식이다. 게임에서 졸병들은 많이 죽어도 게임에 크게 영향이 없고, 게임을 좌우할 대장들만 죽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졸병정도는 리셋버튼 눌러서 다시 살려낼 수 있고, 다 죽으면 게임을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 하나뿐인 인간의 목숨이지만 이들에게는 컴퓨터게임의 소모품 졸병처럼 그다지 중요하지 않는 것이다. 인명경시현상이 자연스레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어느 마을에서는 아들을 서울대학교에 보내지 말라는 역설(逆說)적인 이야기가 있다. 친구아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면사무소에 들어갔고, 자기아들은 공부를 잘하여 서울대학교에 들어갔다고 한다. 공부를 잘한 아들은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외국 유학을 가서 거기서 유학생과 결혼하여 외국에서 살고 있다.
공부에 바빠서 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도 와보지 못했다고 한다. 혼자 남은 그 노인은 세 끼를 스스로 해결해야 하고 옷도 자기가 빨아 입어야 했다. 아내가 죽었지만 아들은 물론 마을 사람들도 별로 찾아주는 사람이 없어 무척 쓸쓸한 장례였다고 한다.
한편, 친구아들은 면사무소에 다닌 관계로 마을 사람들로부터 호의적인 대우도 받고, 농협에 다니는 며느리도 아침저녁으로 문안인사를 했다. 철따라 옷도 바꾸어 입는 등 자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여건이었다. 친구아내의 상(喪)을 당했을 때도 온 동네사람들이 문상을 하는 등 자기의 처지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분위기였다. 그는 이내 몸져눕고 쓸쓸이 임종을 맞아 아들을 서울대에 보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행복지수는 OECD 국가 중 최하위고 자살률은 최고라고 한다. 우리 국민의 행복지수는 방글라데시 국민들보다 낮다고 하니 행복은 외형적 가치에 있는 것이 아닌가 보다.
많이 배운 사람들이 나라의 중요한 일을 맡을 때 부정을 저지르고 잘못된 정책을 편다면 그 해악은 참으로 크다. 이러한 사람은 이름 없는 청소부보다도 못한 것이다.
천안함사고 때 온 국민이 애도하는 기간에 터진 스폰서검사들의 부패행각은 한없이 초라하고 천박하게 느껴졌다. 우리나라 권력집단의 윤리의식과 직업정신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공부로 경쟁하는 법만 알았지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나 사려 깊은 인성과 가치관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쟁에 내몰리는 아이들, 자살증가율이 가장 높은 국가, 이는 분명 우리의 가치관에 문제가 있다는 반증이 아닐 수 없다.
산에 있는 나무는 서로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일이 없다. 큰 나무는 큰 나무대로 작은 나무는 큰 나무에 대하여 아무런 불평도 없이 자기 자리를 지킬 뿐이다.
우리의 청소년들이 건전한 정신과 인생관을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가정과 학교, 사회의 노력이 절실하다. 청소년들이 바른 인성과 가치관을 형성할 수 있도록 인문학적 기반을 다시 생각해야 할 시점이다. 청소년들이 사고의 지평을 넓혀 미래의 주역으로서 굳건히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피어보지도 못한 젊은이들이 아파트 옥상에서 차디찬 시멘트바닥으로 몸을 던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석양 무렵에 본 왕궁리 5층 석탑의 아름답고 의연한 자태가 신비롭다. 숱한 세월이 흘렀음에도 어떻게 저토록 의연한 모습으로 서있는 것일까? 나는 우리 청소년들이 저 탑처럼 굳건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한 세상을 살아 갈 수 있기를 염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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