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문화][여행] 섬진강 봄나들이(2001.03.21)
산수유가 핀다길래 전남 구례 산수유마을로 향했으나 아직 산바람이 매섭다. 하여 산으로 갈까 망설이고 있는데 눈앞에 거지 행색의 대학생 둘이서 태극기를 메고 자전거를 끌고 간다. “어디 가는 길이신지.” “우리는 경기도 광명시 광명고등학교 선후배 사이로, 군 입대를 앞두고 나를 찾기 위하여 자전거 여행중인 학생이로소이다.”
이름은 최제용(20·건국대 회화과)과 서용석(21·한양대 디자인학과)이라 했다. 보름째. 여행 절반을 끝내고 지리산을 ‘화끈하게’ 동강낸 횡단도로를 넘어 남원으로 북상하려던 참이라 했다. “산은 추우니 강으로 가시게” 하자 자전거를 묶어두고 따라온다.
19번 국도는 구례를 지나 광양으로 내려간다. 길이 섬진강을 만났다. 강물은 이미 녹았고, 색깔은 매우 푸르다. 운조루에 닿았다. 풍수학자들이 조선 땅 3대 명당의 하나로 꼽는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있는 집이다. 한반도를 절색 미녀로 치면 구례땅은 그녀가 무릎을 꿇고 앉으려는 자세에서 옥문에 해당하고, 그녀가 신랑과 잠자리를 하기 직전에 풀어놓은 금가락지가 바로 이곳 운조루 자리라 한다. 18세기 중반, 남한산성을 비롯해 대규모 건축사업에 간여했던 유이주라는 인물이 7년 만에 지은 집이다. 풍수가 맞은 것인지, 유씨 집안에서는 숱한 입신양명과 발복이 잇따랐고, 이현상의 남부군 부대와 지리산 토벌대가 마을을 불지르고 싸우는 와중에도 무사했다고 한다.
스케일이 무척 웅장하여 궁전을 축소한 듯하다. 제용씨가 물었다. “이게 뭔지.” 커다란 나무 뒤주가 있고 그 위에 ‘타인능해(타인능해)’라 적혀 있다. “마을 주민 누구나 와서 쌀을 퍼갈 수 있다는 뜻”이라고 부연돼 있다. 발복한 재물을 주민과 나눠가짐으로써 그 복을 유지한 것이다.
운조루를 나와 강을 따라 계속 남하한다. 산기슭에는 매화가 가득 피었다. 왼편으로 쌍계사 가는 길이 나온다. 거목으로 자라난 벚나무가 연이어 있는 10리 벚꽃길이다. 쌍계사 위로 칠불사가 있다.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성불했다는 곳이다. 중창을 거듭해 고찰 분위기는 없지만 정갈한 경내가 기분좋다. 성불한 연대가 서기 103년이니, ‘불교 전파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이라는 국사책 기록보다 250여년이 빠르다.
종잡을 수 없는 내력을 곱씹으며 길섶 찻집에 들른다. 이름은 ‘관향다원’, 여주인 이호영씨가 반긴다. 함께 봄 햇살 아래 차를 든다. “다도는 어떻게 하지요?” 용석씨가 묻는다. “음, 그게 이래요…”하며 다도론이 나온다.
차맛을 즐기기 위해 자연스럽게 몸에 배는 게 다도라는 것이다. 향기를 맛보기 좋으라고 자세를 바르게 하고, 친구와 차를 함께 즐기려다 보니까 다기도 새로 장만하게 된다. 방식에 이끌려 자유를 잃게 되면 차 향기도 사라진다고 했다. “중국 차는 향이요, 일본 차는 빛깔을 즐긴답니다. 우리 차는 기, 그러니까 기분으로 즐긴다고 느껴요.” “차 잎이 말해주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차맛이 나온다”고도 했다. 용석씨와 제용씨, 알듯 모를 듯한 철학에 표정이 묘하다.
여주인은 “솔잎차를 들자”며 볕이 좋다는 우리를 굳이 방 안으로 청한다. 문지방을 넘는데, 연꽃 향이 퍼진다. 연꽃이! 네 벽 온통 연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다. 친한 화가가 그려놓고 갔다고 했다. “자랑하려고 했죠?” 여주인 입가에 연꽃처럼 미소가 퍼졌다. 차를 홀짝이는데, 온몸이 화끈하다. “솔잎차는 몸을 덥히죠. 남자들 많이 드세요.” 그래서 혀 데는 줄 모르고 꼴딱꼴딱 마셔대는데 손님들이 들이닥쳤다. 고마움을 표시하고 물러나온다.
강 따라 하동으로 갔다가 다리를 건너면 광양이다. 매화가 만개한 매화마을이다. 가장 큰 매화밭을 가진 청매실농원 사람들이 반긴다. “여기 노비 두 명 왔다!” 여비가 곤궁하던 차라 반갑게 노비 신분을 받아들이며 청년들은 강가로 갔다.
섬진강에 햇살이 반짝였다. 두 대학생이 강으로 내려가 바위에서 강물을 한번 보고 모래톱을 한번 보고 하늘을 한번 본다. “나를 찾으러 왔는데, 어느 정도 정리가 된 것 같아요.” 햇살 위로 불어오는 봄바람 속에 매화향이 날렸다. 짙은 실루엣으로 빛나는 젊은이들, 아름답지 않은가! 이 봄만큼, 이 봄날 매화향기처럼.
(글·사진=박종인기자)
■여행수첩
▲가는 길(서울 기준):
①손수운전:호남고속도로 전주IC→ 전주→ 임실→ 남원 →구례IC에서 나와 19번 국도 하동 방면. 운조루, 쌍계사는 이 길에 이정표가 있다. 하동에서 우회전, 섬진교 건넌 뒤 우회전해 직진. 매화마을 이정표가 수시로 있다. ②대중교통:남부터미널에서 하동행 버스 하루4회. 영등포역에서 매일 23시35분 하동행 무궁화호로 다음날 06시22분 도착. 그날 오후에 귀경. 하동에서 매화마을은 택시.
▲들를만한 곳:
①청매실농원(061-772-4066):매화 장인 홍쌍리씨가 만든 매화 정원. 이번주 말이 절정이다. 각종 매실제품 판매 중. 전화 주문 및 택배 가능. 24,30일에 매화마을로 가는 무박2일 관광열차 운행. 문의는 철도청 1544-7788.
②쌍계사 및 칠불사:하동에서 군내버스. 칠불사는 꼭 가본다. 최근 다시 세웠지만 신축 건물답지 않은 고즈넉한 산사 분위기.
③관향다원(055-883-2538):쌍계사에서 칠불사로 가는 길에서 시멘트 포장길 나오면 1.2㎞ 가서 왼편. 간판 없음. ‘밤밭골가든’ 간판 직전이다. 논에 주차. 정말 예쁜 전통찻집이다. 연꽃으로 수놓은 방, 황토로 만든 찜질방이 있어 기분좋게 묵을 수도 있다. 숙박 여부는 전적으로 여주인 이호영씨에게 달려 있다. 차 값은 ‘알아서’ 낸다. 대개 5000원이라고. 쑥과 토종꿀을 찌고 말리고 섞고 또 쪄서 만든 ‘쑥환’, 몸을 데우는 솔잎차도 있다.
▲먹을거리:재첩회, 재첩국. 회는 2만원, 재첩국 백반은 5000원선. 하동, 구례 어디건 식당이 많이 있다.
▲묵을 곳:관향다원 이호영씨에게 ‘잘 보이거나’, 청매실농원 안에 있는 민박집(워낙 인기가 좋아 늘 꽉 찬다)을 이용할 수 있다. 하동, 구례에 모텔, 민박집 다수. 이제 막 피기 시작한 지리산 산수유를 감상하려면 지리산온천지구의 모텔을 이용하면 된다. 구례군청 (061)780-2530, 하동군청 (055)880-2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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