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례 운조루(雲鳥樓) 공식 홈페이지 ▒

ㆍ작성자	이우철
ㆍ작성일	2019-12-29 (일) 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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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팥죽의 추억
동지팥죽의 추억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이우철

며칠 전 아내와 함께 팥죽집을 찾았다. 어릴적 즐겨먹던 동지팥죽이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음식도 추억으로 먹는다는데 나도 별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그토록 싫어했던 꽁당보리밥과 고구마도 요즘은 잘 먹는다.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팥죽이 어른거려 자주 죽집을 찾지만 좀처럼 그 맛을 찾을 수가 없다.

농촌의 겨울은 비교적 한가롭다. 추위가 가장 매섭다는 대한도 동지즈음에 들어있어 따뜻한 방에 있으면 굴풋하기 마련이다. 과거 3대가 함께 살던 우리 집에 동짓날 팥죽 쑤는 일은 축제나 다름이 없었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불을 지펴 팥을 삶았고 다른 가족들은 찹살가루를 반죽하여 새알심을 만들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만들다보니 새알모양이 볼품은 없지만 크게 괘념치 않았다.

해가 지고 어둠이 가까워오면 삼촌은 집주변에 등불을 밝혔다. 접시나 깍쟁이에 기름을 치고 심지를 만들어 처마밑으로 줄줄이 불을 밝혔으니 멀리서 보면 한 폭의 그림이었다. 팥죽이 다 끓여지면 어머니는 부엌, 곳간, 창고 등 집 주변을 돌면서 외벽에 솔잎으로 팥죽을 뿌렸다. 잡귀를 물리치고 가족의 건강과 소원을 빌던 어머니의 바람이었다. 집 주변에 불이 모두 켜지면 가족들은 도란도란 팥죽을 먹었다. 동지는 아세(亞歲)라 하여 팥죽을 먹으면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고 했다.

동지팥죽은 옛날 중국 진나라 ‘형초세시기’에서 유래한다. 옛날 공공이라는 사람에게 늘 속을 썩이던 아들 하나가 있었다. 그 아들 때문에 하루도 맘편할 날이 없었다. 어느 동짓날 그 아들이 죽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그만 역질귀신이 되고 만 것이다. 공공은 생전에 아들이 팥을 무서워했다는 기억을 떠올리고 팥죽을 쑤어 이웃들에게 돌리고 귀신을 쫓았다고 한다. 붉은 색은 귀신이 싫어하는 색이라 하여 팥을 그런 용도에 사용했던 것이다.

농촌의 행사나 세시풍속을 전하는 농가월령가(11월령)에도 동짓날의 전통풍습이 전해지고 있다.

“동지는 좋은 날이라 양(陽)이 시작하는구나.

제철이라 팥죽 쑤어 이웃과 나누어 먹세.

새 책력 널리 펴니 내년절기 어떠한가.

해 짧아 덧이 없고 밤 길기 지리하다.”

동짓날엔 새해를 잘 계획하라는 의미로 이웃끼리 달력을 선물하기도 하고,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버선을 지어 선물하기도 했다. 단오가 가까워오면 여름철 부채를 선물하고, 동지에는 책력을 선물했다. 책력은 농경사회에서 너나없이 깊은 관련을 맺고 있던 터라 요긴하게 펼쳐보던 생활지침서였다.

서양에서도 비슷한 풍습은 있었다. 유대인들이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시절, 애굽 전역에 장자가 죽어가는 재앙이 내리고 있었다. 종살이하던 유대인들을 풀어달라는 지도자 모세의 요청을 애굽왕이 거절하여 신이 내린 재앙이었다. 이에 유대인들은 붉은 양피를 문설주나 인방(引枋)에 발라 재앙을 면할 수 있게 되었으며, 유대민족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찾아 출애굽여정을 떠난 것이다. 그 날을 기념하는 유월(pass over)절 행사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동지가 되면 지난해 운명하신 어머니생각이 아른거린다. 언젠가 머리 파마를 하신다기에 모래내시장 단골집인 ‘나비미용실’에 모셔다 드렸다. 파마가 끝나고 점심때가 되어 시장안에서 팥죽을 함께 먹었다. 늘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음식이어서 가끔 한 그릇씩 사다 드리기도 했다. 추운 겨울이면 어김없이 끓여주시던 동지팥죽의 추억을 잊을 수가 없다. 오늘따라 어머니가 몹시도 그립다.

(2019. 12.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