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례 운조루(雲鳥樓) 공식 홈페이지 ▒

ㆍ작성자	김성은
ㆍ작성일	2019-08-29 (목)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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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추천: 0 ㆍ조회: 487

서울살이를 그리는 시골맹인

서울살이를 그리는 시골 맹인

신아문예대학 목요야간반 김성은

내가 익산시민이 된 지도 언 17년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대학에 갈 때까지 목동에서 살았다. 대구로 대학진학을 하면서 경상도 땅을 처음 밟았고, 익산에 취업을 하면서 전라도에 둥지를 틀었다. 전북 익산은 제2의 내 고향이 되었다.

여름 방학을 맞아 중학교 동창들을 만났다. 접선 장소는 서울 지하철 6호선 한강진역이었다. 목동에서 신교동까지 나는 중·고등학교를 지하철로 통학했다. 오랜만에 혼자 지하철을 타니 감회가 새로웠다. 딸 유주를 동생 영선이에게 맡겼다. 지하철 안내 도우미를 신청하고 한강진역까지 무탈하게 착지했다. 대범이를 만났고, 유미와 혜주가 속속 도착했다. 대범이가 공들여 계획한 일정에 따라 우리는 이태원 맛집에서 브런치를 먹었다. 여러 나라 언어들이 소란스럽게 뒤엉키는 카페에 마주 앉아 그간의 안부를 나누었다.

뮤직컬 벤허는 웅장했다. 남자 배우들의 하모니는 장엄한 서사와 함께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기독교 신자인 나는 노랫말 하나하나에 감흥했고, 깊은 은혜를 받았다.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무대를 직접 볼 수 없어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었지만 혼신을 다한 배우들의 열연과 열창에 감동 받았다. 저녁은 모이또를 곁들인 양식이었다. 해외 출장 경험이 많은 유미가 추천하는 메뉴로 이름도 생소했다. 음식을 썰고 싸고 소스를 뿌리고 하는 과정은 저시력인 대범이가 도와주었다.

일상에서 내 저녁 시간은 보통 이렇다. 퇴근하면 친정 엄마 집에서 저녁을 먹는다. 7시쯤 귀가하면 유주 수업을 봐주고, 샤워를 시킨 다음 10시쯤이면 불을 끄고 동화책을 읽어주며 아이를 재운다. 유주가 잠들면 나도 잠자리에 든다.

그런 내게 오후 8시쯤의 산책은 그 자체가 일탈이다. 외국인들로 붐비는 이태원 거리 풍경은 시골 맹인을 현혹시키기에 충분했다. 터키 음식냄새가 골목에 가득했고, 국적을 알 수 없는 젊은이들이 살벌하게 싸움판을 벌이기도 했다.

혜주 집에서 하루 묵기로 한 우리는 작심하고 거리를 쏘다녔다. 내친김에 노래방을 찾았다. 중학교 때 애창하던 노래를 마흔 넘은 아줌마들이 부르고 있었다. 친구들의 목소리는 여전했다. 신기하게도 열다섯 살 느낌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재미있고 흥겨운 현장에서 뜬금없이 눈물이 났다. 목청을 돋우며 얼른 눈물을 닦았다. 내 표정을 알아차릴 수 없는 친구들은 텐버린을 흔들며 깔깔거렸다.

자정이 다 되어서야 우리는 집에 들어갔다. 집앞 편의점에서 맥주와 소주, 안주를 잔뜩 샀다. 요즘 유행한다는 깔라마시도 하나 챙겼다. 시원하게 샤워하고 다시 둘러 앉았다. 해가 밝도록 우리는 잠들지 않았다. 정확히 24시간을 함께 논 우리는 용산구청 앞 칼국수 집에서 해장을 하고 작별했다.

20년 가까이 서울에서 살았지만 나는 촌뜨기가 다 되어 있었다. 지하철 도우미 엡을 활용하면 훨씬 간편하게 안내를 요청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흰지팡이를 펴들고 땀을 뻘뻘 흘리며 도시철도공사에 전화를 걸어 아날로그 방식으로 도우미를 요청했다. 환승하는 구간까지 안전하게 직원의 안내를 받은 나는 같은 번호로 칭찬 민원을 접수했다. 지하철은 쾌적하고 신속했다. 열차 주행경로가 고정적인 지하철은 시각장애인들에게는 최적의 교통 수단이다.

대중교통이 발달하지 않아서 주교통 수단이 자가용인 익산 생활은 그래서 내게 매우 심심하다. 다양한 스포츠 활동부터 점자책이 진열된 북카페까지 시각장애인들의 품위 있는 여가 생활이 가능한 서울에서 살고 싶다는 열망에 새삼 몸살을 앓았다. 활동보조 인력이 많고, 건전한 복지 프로그램이 넘치고, 다채로운 문화 공연이 펼쳐지는 서울에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월요일 아침 새벽 운동을 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출근했다. 상쾌한 가을 바람에 깻닢향이 실려 왔다. 코스모스가 피고, 키 큰 해바라기가 고고한 자태를 뽐낸다. 집에서 몇 발작만 나가도 드넓은 논밭이 펼쳐지는 시골 풍경은 빌딩숲과 교통 정체에 질려 버린 서울내기에게 격한 해방감을 주었다. 바다가 가깝고 대지가 넓고, 집값이 싸고, 투박하지만 정다운 사람들이 있고, 무엇보다 시골은 서울보다 덜 각박한 느낌이라서 좋다. 그랬던 내가 체계적인 복지서비스 앞에, 다채로운 문화공연 앞에 사정없이 무너져 내렸다. 심각하게 서울 입성을 점쳐봐도 이렇다 할 비책이 없다. 영선과 혜경이가 수도권에 둥지를 틀고 있음이 얼마나 다행인가? 정겨운 지인들과 어울려 뮤직컬과 연극공연을 쫓아 다니는 시간이 꿀 같았다. 12시가 되면 마법이 풀려 버리는 동화 속 신데렐라 호박마차처럼 서울의 밤이 깊어갔다.

다시 교탁 앞이다. 학생들과 말하고, 웃고, 수업하고, 회의하고, 결재를 받았다. 그러는 사이 내 몸은 자연스럽게 근무 모드로 세팅되었다.

(2019.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