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꼭 한 번은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한라산 백록담이다. 누구랑 어떻게 갈까 생각하며 미루었는데 더 나이가 들면 평생 못 갈 것 같아 길을 나섰다. 배낭을 꾸려 버스를 타고 군산공항으로 갔다. 대합실엔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어린이를 데리고 가는 휴가객, 친구들과 함께 가는 등산객, 출장 가는 회사원들이 보였다. 삼삼오오 모여 여행의 기쁨을 나누느라 왁자지껄했다.
거침없이 솟아오른 비행기는 파란 하늘을 조용히 날았다. 높은 한라산을 무난히 오를 수 있을까 생각하는 사이에 푸른 바다에 떠 있는 화산섬, 제주도가 나타났다. 한라산 정상이 우뚝 솟아 보였다. 내일은 기필코 백록담을 볼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마음이 설렜다. 제주국제공항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제주의 탄생 이야기가 담겨있는 관덕정과 민속자연사박물관을 찾았다. 부근의 모텔에 투숙해서 일찍 잤다.
한라산 정상에 오르려면 성판악에서 출발하여 관음사로 내려와야 좋다고 해서 아침 일찍 택시를 타고 성판악으로 갔다. 성판악 매점에는 김밥과 라면, 물과 음료수 등을 팔고 있었다. 김밥과 생수를 사서 배낭에 넣고, 등산화 끈을 단단히 잡아매고 등산객들의 틈에 끼어 출발했다. 인천에서 광주에서 온 산악회원들이었다. 그들은 나보다 큰 배낭을 메었지만, 산악대장을 따라 일사불란하게 내달렸다. 나는 체력을 감안해 거북이걸음을 걸었다. 젊은 여성에게도 길을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묵묵히 걸었다. 심장은 고동치고 맥박은 거침없이 팔딱거렸다. 주위는 조용했다. 참나무 그늘 아래 나만 홀로 걷고 있었다. 바쁘게 쫒아가도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다. 울창한 숲속이라서 두렵기도 했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 아직도 가야할 길은 너무나 멀었다. 의지할 것이라곤 지팡이 뿐이었다. 어렵사리 속밭대피소에 도착했다. 출입문 옆 의자에 앉아 간식과 물을 마시며 에너지를 보충했다. 벌써 정상을 다녀와 하산하는 사람도 있었다. 훈련을 마치고 자대로 배치되는 선임병(先任兵)처럼 가볍게 보여 무척 부러웠다.
사라오름 입구를 지나며서 가파른 길로 접어들었다. 한 걸음을 떼기가 힘들었다. 검은 현무암 덩어리에 발이 차였다. 고개를 푹 숙이고 한 발 한 발 걸었다. 서너 발 걸을 때마다 모자 끝 차양에 방울방울 맺혔던 땀방울이 돌에 떨어져 흔적을 남겼다. 마신 물이 모두 땀이 되어 나오는 것 같았다. 비좁은 길에 사람들이 밀려 있다가 비켜갔다. 원체 가팔라 오르기 힘든 코스였다. 나는 채면불구하고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물을 마시며 올라오는 사람들을 지켜봤다. 모두 기진맥진해 보였다.
파란 하늘이 보이고 나무계단이 나타났다. 난간을 잡고서 뒤 돌아본 풍경, 비바람에 꺾여 분재처럼 자란 구상나무 사이로 서귀포 앞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졌다. 푸른 바다와 오름 사이로 어우러진 시내는 한 폭 수채화처럼 아름다웠다. 아고산대의 우점종인 구상나무가 갈맷빛을 띠고, 자작나무 가는 잎이 손을 흔들며 반겼다. 몸통을 벗어버린 고사목은 그저 말없이 서있었다.
정상을 오르는 사람들이 오색 동아줄처럼 굽은 길로 이어졌다. 얼마 남지 않았다는 기대로 힘이 솟았다. 계단 위에서 뒤돌아보는 순간 거센 바람이 먼저 마중 해주었다. 모자가 날아갈 것처럼 휘몰아쳤다. 제주 삼다 중 하나임이 들림 없었다. 고산지대로 민둥한 정상엔 벌써 300명이 넘는 사람들로 빼곡했다. 국제관광지답게 외국인도 상당히 있었다.
사진을 찍기도 하고, 햇볕 아래 쉬기도 하고, 군데군데 둘러앉아 점심을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줄을 서서 백록담 표석 앞에서 인증사진을 찍었다. 움푹 파인 한라산 분화구, 백록담을 내려다보며 사진을 찍고 또 찍었다. 분화구엔 엊그제 내린 비로 물이 고여 한층 보기 좋았다. 날카로운 바위능선으로 둘려진 백록담 지형은 종상(鐘狀)이었다. 쉽게 다녀올 수 있는 거리지만, 경관 보존을 위해 울타리를 치고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사슴이나 즐겨 찾을 백록담이다.
사람들 틈바구니를 오가며 제주의 자연을 마음껏 감상했다. 구름 없이 화창한 날씨에 제주의 꼭지점, 한라산 정상에서 조망하는 제주바다는 쪽빛 그대로 수평선이 아득했다. 그러께 아내와 영실대피소를 출발해 웃세오름 선작지왓(고산초원)에 도착해 너른 평원에 흐드러지게 핀 산철쭉 꽃을 보고 감격했었다. 분화구 남벽의 검은 절벽을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정상과 갈려야했던 마음은 너무 아쉬웠다. 74세가 된 이제 그 꿈을 이루니 실로 감개무량했다.
거센 바람에도 까마귀가 날아다녔다. 김밥을 꺼내 먹고 물도 마시고 느긋한 마음으로 한 시간 동안을 쉬었다. 언제 다시 오를 수 있을까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제주시 방향인 관음사 쪽으로 향했다. 산 아래로 제주시가 평화롭게 보였다. 소담한 철쭉과 키 작은 구상나무 솔방울이 하늘로 치솟아 앙증맞게 다닥다닥 붙어있어 이색적인 경관이었다. 가파른 계단을 내려와 헬기장에서 올려다본 왕관능선(王冠稜線)은 한라여신의 왕관처럼 빛났다. 굽은 탐라계곡을 돌아오다가 백록담수가 여과되어 나오는 샘물을 한 바가지 마시니 온몸에 시원한 기운이 돌았다. 삼각봉 대피소에서 쉬고 저물기 전에 내려오려고 발걸음을 재촉해 오늘의 목적지인 관음사 옆 캠핑장에 도착했다. 무려 10시간이 걸렸다.
몸은 피곤해도 등산 뒤에 얻어지는 의미는 컸다. 백두산 천지, 금강산 만물상, 설악산 대청봉, 소백산 연화봉, 지리산 천왕봉이 눈에 선하다.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었고, 천연기념물과 관광자원이 널려있는 제주도, 이야기도 많고 전설도 풍부한 한라산 등산으로 기어코 마침표 하나를 또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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