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례 운조루(雲鳥樓) 공식 홈페이지 ▒

ㆍ작성자	고안상
ㆍ작성일	2019-05-29 (수) 0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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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추천: 0 ㆍ조회: 477

장원하신 초남 조부님
壯元하신 楚南祖父님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금요반 우남 고안상

초남시집(楚南詩集)에서 조부님이 다양한 소재를 이용하여 쓰신 수많은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사람, 자연, 사물, 절기 등 수많은 소재를 이용하여 쓴 시와 애사, 경사 등에 보낸 시들을 모두 모으면 800수 이상이다. 이들 조부님의 시중에서 유재영 박사는 자서전적인 대표작을 '보검(寶劒)'이라고 보았다. 보검을 주제로 ＊절구(絶句)와 ＊율(律)로 된 詩를 각각 한 수씩 남기셨다.

小大各隨用合離自有神 (소대 각수용 합리 자유신)

我亦腰三尺遇時適萬人 (아역 요삼척 우시 적만인)

작고 큰 것이 각기 쓰임에 따라 / 맞고 맞지 않은 게 절로 신이함 있네

나 또한 삼척 검을 차고서 / 때를 만나면 만인을 대적하리.

柄授英雄大假鳴風塵萬國指前程 (병수영웅 대가명 풍진만국 지전정)

千金寶價層雲薄三尺神光劈月橫 (천금보가 층운박 삼척신광 벽월횡)

養生雖得屠牛解杖出那知走狗烹 (양생수득 도우해 장출나지 도구팽)

平生一片歌相和我豈漸離君慶卿 (평생일편 가상화 아개점리 군경경)

칼자루를 영웅에게 주면 크게 빌어 울고 / 풍진 만국에도 앞길을 가리키네

천금 보배로운 가치는 층운이 엷고 / 삼척 신광은 달도 쪼개버리리.

양생에는 비록 소를 잡을 수 있어도 / 지팡이 짚고 나가면 어찌 개 삶는 걸 알겠는가

평생에 한 편 노래로 주고받으니 / 나는 어찌 점리고 그대는 ＊경경이런가.

위 절구에서는 기회가 온다면 삼척 검으로 만인을 대적하겠다는 꿈을, 율시에서는 ＊고점리(高漸離)처럼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하셨다. 가정이 빈한하고 나라마저 잃어버렸으니 그 어디에 의지하며, 꿈을 가지고 노력한다고 한들 그 무엇을 이룰 수 있겠는가마는 그래도 때가 되어 기회가 온다면 자신의 뜻을 펼쳐보겠다는 굳은 마음을 가지셨던 듯하다. 그러나 조부님은 자신의 꿈을 펼칠 기회조차 가질 수 없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 가득하셨을 것 같다.

그래도 제자들을 지도하고, 틈틈이 문인들과 교유하며, 학문을 연마하여 늦은 나이인 59세가 되던 1930년, 전북지사 김서규(金瑞奎)가 내장사에서 연 ＊시회(詩會)에서 장원을 하셨다.

穿林踏石訪寒山惟有蓮菴匪世間 (천림답석 방한산 유유연암 비세간)

一園楓菊風塵遠四壁圖書日月閒 (일원풍국 풍진원 사벽도서 일월한)

腐儒閉戶深藏跡刺史停車特賜顔 (부유폐호 심장적 자사정차 특사안)

但願年年秋大熟更將文酒好相還 (단원년년 추대숙 갱장문주 호상환) (內藏寺詩會)

숲을 뚫고 돌을 밟아 한산을 찾으니 / 오직 절만 있어 세간이 아니네

한 동산에 단풍과 국화는 풍진이 멀고 / 네 벽 도서는 일월이 한가롭네

썩은 선비 문 닫으니 감춘 자취 깊었고 / 자사는 수레에 머물고 얼굴 아니 보이네

다만 원하는 것은 해마다 풍년들어 / 장차 다시 만나 글과 술 나누었으면 좋으리.

조부님께서는 비로소 이 시회에서 당신의 시재(詩材)를 확인하셨다. 장원하니 선망의 눈이 모아지고 ＊삼일유가(三日遊街)는 아니지만 ＊견여(肩輿)를 타고 주변 명소를 돌아보셨다. 그리고 자신의 시를 남기시려고 친우 송종철에게 ＊서(序)를 받고, 그 뒤 문인 문제중의 서(序)와 족제(族弟) 예진의 ＊발(跋)을 받아두신 것 같다. 그리고 시집을 내는 일은 조부님께서 평소 사랑하고 믿음을 두셨던 장손(石泉高河相)에게 맡기셨던 것 같다.

결국 초남시집(楚南詩集)은 조부님이 세상을 떠나신 22년 뒤인 1976년에, 장손의 수고로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사촌 형님께서 처음에는 한문으로 된 시집을 출간했다가, 다시 후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원광대학교 유재영 박사에게 국역 초남시집을 부탁하여 1995년에 간행했다. 석천(石泉) 형님께 고개 숙여 감사의 마음을 드린다. 우리 후손들이 부담 없이 조부님의 글을 읽고 또 감상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고맙고 감사할 일인가? 앞으로 후손 중 누군가는 우리 고가(高家)가 ‘당대(唐代) ＊두가(杜家)의 시명(詩名)에 부끄럽지 않다.’라고 하신 조부님의 그 믿음을 초남시집 등 자료를 통해 많은 연구와 노력으로 밝혀내 주었으면 좋겠다.

(2018. 08. 01.)

＊경경(慶卿) : 위(衛)나라 사람 형가(荊軻)를 이름. 연나라 태자의 부탁으로 진왕을 죽이러 갔다가 실패하고 죽임을 당함

＊고점리(高漸離) : 연(燕)나라 사람으로 축(筑)을 잘 쳤다. 형가(荊軻)와 같이 진왕을 죽이러 갔다가 형가가 실패하자 이름을 바꾸고 남의 머슴이 되었는데 뒤에 이걸 알고 진시황은 점리가 축을 잘 치기 때문에 실명시켜 가까이 두고 부렸는데 점리가 축속에 연(鉛)을 넣고 들어가 시황을 치려다가 실패하고 죽임을 당했다.

＊시회(詩會) :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시를 짓고 감상하는 모임

＊삼일유가(三日遊街) : 예전에,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사흘 동안 시관과 선배, 친척을 방문하며 인사하는 일을 이르던 말

＊견여(肩輿) : 행상에서, 좁은 길을 지날 때 임시로 쓰는 간단한 가마

＊서(序) : 책 앞부분에 글쓴이의 생각, 삶, 사상 등을 실마리를 풀듯 조리 있게 서술하는 글.

＊발(跋) : 원래 발뒤꿈치를 뜻하는 용어로써, 책의 뒷부분에 그 책의 성립·전래·간행 경위·배포 등에 대해 써넣는 글이다. 대개 지은이의 지우·선배·후학들이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두가(杜家) : 당대의 저명한 시인 조부 두심언과 손자 두보(자미)로 이어지는 가계를 일컬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