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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ssay
'행촌' 에세이모음
작성자 정남숙
작성일 2020-10-03 (토) 06:08
홈페이지 http://crane43.kll.co.kr
ㆍ추천: 0  ㆍ조회: 121      
나의 살던 고향은
나의 살던 고향은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정남숙







 나의 살던 고향은, 동요 가사 그대로, 꽃피는 산골이다. 새봄이 돌아오면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가 지천으로 피었다. 고향을 그리워하고 고향을 찾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유는 달라도 정든 고향을 떠나 사는 사람들이다. 고향에서 나고 자라 한 평생을 고향에서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일단 고향을 떠나봐야 고향의 그리움을 안다. 엄마와 고향은 같은 어원에서 나왔나보다. 생각만 해도 코끝이 찡하기 때문이다. 엄마의 품속같이 언제 가도 나를 반기고 품어 줄 것만 같은 곳이 내 고향이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고향을 맘속에 새기며 살았다. 어른들의 가르침이 있었는지 아니면 우리 스스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높은 곳이나 토방에서 마당으로 뛰어내릴 땐, 그냥 뛰어내리지 않고, 언제나 양팔을 앞뒤로 내저으면서 외치는 말이 있다. “나도 나도 전라도, 전라도는 완주군, 완주군은 소양면, 소양면은 용연리, 용연리는 OOO, OOO은 ㅁㅁㅁ" 하면서 멀리 폴짝 뛰어내린다. OOO은 자기의 이름이고 ㅁㅁㅁ는 장래에 되고 싶은 꿈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 매번 고향도 기억하고 꿈을 이루기 위한 자기 최면을 걸었다. 우리 형제들만 그랬는지 다른 집 아이들도 그랬는지는 확실치 않다. 우리는 그랬으니깐.



우리 고향은 아득한 옛날부터 부족국가를 이루고 살던 곳이었으며 1700년대 후반 전주지(일명=완산지)에 전주부 소양면이란 면명(面名)이 기록되었다고 한다. 소양면이란 이름도 여러 설이 있다.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를 통해 들었던 소양의 전설에는, 조선의 건국 당시 선죽교에서 살해된 정몽주의 생질인 만육(晩六) 최양(崔瀁)을 빼놓을 수 없다. 그가 살았던 탓에 그의 이름인 최양이 구음으로 전해오다 소양으로 변했다는 설과 그와 동문수학한 태종이 직접 찾아와 재상자리를 권했으나 “충신(忠臣)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며 따르지 않은 탓에 두문동 72현에 포함되었고, 태종은 최양을 소왕(小王)으로 대우하여, 그가 살고 있는 반경 전록 80결을 그에게 바치라며 떼어준 곳이라 하여 소왕이라 부르던 것이 소양으로 변했다는 설이다. 그러나 최양은 거둬들인 곡식을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최양은, 고려 문충공(文忠公) 휘 군옥계(君玉系)를 시조(始祖)로 모신 전통적인 토착 전주 최씨로 상산(常山)에서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지므로 전주최씨가 되었다고 한다. 정몽주의 문하에서 사사하여 29세에 이방원과 함께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대제학(大提學)에 올랐으나,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살해되자 벼슬을 버리고 전북 진안 팔봉산에서 3년간 은거(隱居)하다, 완주군 소양면 신원리로 퇴거(退去)하여 은둔생활을 했다. 태종 이방원이 군사를 데리고 찾아왔으나 출사를 거절하고, 세종 6년(1442년)에 타계하자 소식을 듣고 세종은 슬퍼하며, 3일간 조회를 폐하고 고기를 먹지 않으며 승지를 보내어 제문을 지어주었고, 태조를 도와 황산대첩에서 종사관으로 공을 세운 최양을 잊을 소냐며 특령(特令)을 내려 그 자손이 벼슬길에 오르거든 아낌없이 쓸 것이며, 혹 그의 자손 중 살인자가 있을지라도 악형을 주지 말고, 군역의 폐를 당할 때에 그를 살피지 못한 관리에게는 형을 주고 징계하라는 어명을 내렸다고 한다. 이와 같은 충신의 공적을 빛내기 위해 그의 호를 따 만육 자손이라 하여 최양은 만육(晩六) 최씨(崔氏)의 시조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 마을 근처에는 새[新] 왕이라는 신왕리가 있고, 왕이 쉬어간 정자라 하여 왕정리라는 이름의 마을이 있다. 용연리(龍淵里)라 불리는 우리 마을은 전주 시내에서 12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시골 마을이지만 26번 국도 (군산-대구)인 신작로에 연접해 있어 도시 성향을 띠고 있는 곳이다. 우리 동네 앞에 흐르는 냇물은 신촌에서 흘러오는 안니 물과 오성리에서 흐르는 물이 합쳐지는 양수리(兩水里) 두물머리로, 마을 이름같이 용연 제의 연못을 이루고 있었다고는 하나 우리의 기억엔 없고, 마을의 아래쪽 소양 소재지 중간에 소꼬소꼬라 불리는 소(沼)와 동네 위쪽엔 용이 살다 승천했다는 용모소꼬라는 용이 살았을 법한 깊은 웅덩이의 소가 위아래에 있어, 물이 마르지 않는 곳으로 어렸을 때 남자애들을 피해 여자애들만의 물놀이하던  소양 천 상류를 이루고 있다. 마을 뒷산 용무골, 서당골, 고상골 등으로 부르는 골짝은 천수답을 이루고, 앞산 밑 시내 건너 봉암리는 송광사 일주문이 있던 곳으로 송광 나들이라 불렀다.



지난해 어느 날, 점심을 먹으려고 따라나섰는데 간 곳이 내 고향 소양이었다. 식사 장소에 가기 전 들러볼 만한 곳이 있다하여 차에서 내려와 보니 우리 마을 조금 지나 외갓집 가는 중간 길목인 해월리 모퉁이였다. 우리 집과 외가의 거리는 4Km 정도 떨어진 거리지만, 항상 걸어서 다니던 길이라 그 간의 길 주변은 내 손바닥 안에 있었다. 외가길 중간지점 선바위의 전설이 있는 곳으로 깎아지른 절벽 바위가 거의 1Km의 반월(半月)을 그리며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곳이다. 신작로와 냇물이 사이좋게 맞붙어 있어 외갓집 가다가 힘들면 물에 내려가 잠시 쉬었다 가기도 했던 곳이다. 지금은 직선코스로 새로운 길이 뚫려서 차량이 뜸하지만, 2~3년 전 가로수로 황매화를 심어 꽃길을 조성해 놓아 관광지로 탈바꿈하고 있는 중이다.  


 이 절벽 바위를 선바위라 부른다. 옛날엔 3개의 큰 바위가 있었는데 2개는 해방 전 신작로 설치로 없어지고, 1개는 6.25 사변 후 도로 확장 공사로 옛 모습은 볼 수 없다. 지금은 절벽으로만 길을 따라 둘러 서 있다. 이곳에는 우리 아버지의 경험담이 스며있는 곳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출장을 갔다가 해질녘 늦게 이곳을 지나려면 선바위 위에서 호랑이가 모래를 흩뿌리곤 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행여 의심할라치면 불 켜진 호랑이 눈과 마주쳤다는 말씀까지 더 해주셔서 우리는 항상 그 길을 지날 때마다 호랑이가 나타날 것만 같았었다. 또한 바람 이야기도 있다. 남원 임실에서 전주로 들어오는 첫 관문인 전주 좁은 목 바람이, 이곳 해월리 모퉁이 바람과 혼인을 맺자 하니 거절했다는 얘기다. 좁은 목 바람보다 이곳 바람의 셌다는 얘기가 재미있었던 곳인데, 사람들은 옛날의 전설은 조금도 모르면서 길가에 심어놓은 황매를 즐기려 그 길을 걷자 한다.



 우리 고향에는 많은 전설들이 있다. 송광사 십자각의 전설과 단암사 바위 속 암자의 전설도 있다. 우리 할머니가 밤마다 얘기해 주시던 전주 8경(全州八景) 중 하나인 위봉폭포는, 명주실 두 꾸러미가 다 들어간다는 그 신비의 폭포가 이제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밑바닥을 볼 수 있도록 내려갈 수 있는 층층다리를 놓았기 때문이다. 신비감은 사라졌어도 어린동심을 설레게 했던 것은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서울 남대문 문턱이 대추나무였다고 우기는 사람은 가보지 못한 사람이라 하듯 우리도 어렸을 때는 위봉폭포가 그렇게 깊은 줄로만 상상하며 알았었다. 또한 숙종 원년에 쌓았다는 위봉산성의 재축성을 볼 수 있고 전주 행궁(行宮)이란 위봉별궁은 터만 남아있다. 조선시대 별궁이라 함은 임금들이 머무는 곳을 말하는데 특별히 위봉별궁은 살아있는 임금이 머문 곳이 아니라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이 머문 곳으로 어진을 살아있는 임금과 똑같이 모셨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다.



 나의 살던 고향의 전설은 역사와 함께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하여 아버지 어머니의 대를 이어 구전으로 전해온 많은 살아있는 전통과 역사다. 나의 기억이 다 하기까지 나도 내 손자 손녀들에게 내 고향 역사와 전설들을 들려줘야겠다.

                                                                        (2020. 1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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