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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구연식
ㆍ작성일	2019-05-05 (일) 0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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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감자의 추억
씨감자의 추억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구연식

오랜만에 고향 뒷동산에 오르니 봄이 배냇짓을 하며 살며시 웃더니, 벌써 연초록 꼬까옷을 갈아입고 아지랑이는 너울을 쓰고 아장아장 걷고 있었다. 청보리는 고개를 쭉 내밀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봄바람이 훼방을 놓으니 보리밭 물결은 금세 일렁인다. 텃밭에 탐스러운 감자순이 손짓하여 바라 보니 어린 시절 추억들이 고사리순처럼 올라왔다.

감자는 재배조건이 까다롭지 않아서 풀이 자랄 수 있는 지역에서는 세계 곳곳에서 재배되어 세계 4대 식량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모든 나라에서 구황작물로도 그 몫이 커졌으며, 기호식품으로 개발되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주전부리로 즐겨 먹는다.

세계 육지면적 9분의 1인 동토(凍土)의 땅 러시아에서는 한때 세계 최대 감자생산국가일 때도 있었다. 감자를 주정(酒精)으로 빚은 러시아 '보드카(Voda:물)'는 러시아 국민주(國民酒)를 넘어 지구촌 애주가들이 즐겨 마시는 술의 반열에 올랐다.

세계대전 때 전쟁 당사국들은 감자의 작황과 비축의 정도에 따라 후방 국민들의 전투 여력은 물론 전방 병사들의 전투식량으로 전황에 그대로 반영되어 승전과 패전을 갈라놓아 한때 감자는 탄알과 같은 전투무기로 여겨지기도 했었다.

2005년 세계 식량농업기구(FAO)는 '개발도상국에서 식량으로 감자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자는 뜻'을 밝혀 UN은 2008년도를 ‘감자의 해(IYP 2008=International Year of the Potato 2008)’로 정하고, 2008 국제 감자의 해를 통해 식량 안보를 확보하고 빈곤을 완화하는데 큰 의미를 부여하며 감자를 강조하게 되었다.

우리나라도 식량 자급자족이 어렵던 시절에는 단연 감자가 구황작물이 되었다. 지금처럼 저온 창고나 종자를 보관하는 장소가 적당하지 않았던 시절에, 아버지는 감자 눈이 움푹움푹 파이고 토실토실한 씨감자를 골라서 물이 스며들지 않는 양지바른 언덕에 한 소쿠리를 깊이 파고 묻어 두셨다.

이듬해 이른 봄에 아버지는 씨감자를 꺼내시어 감자 씨눈을 중심으로 두서너 조각으로 나누셨다. 감자에는 유독 둘레썩음병이 쉽게 감염되기 때문에 부억 아궁이에서 나무 재를 한 삼태기 담아다가 칼로 쪼갠 씨감자 면과 버무리면 칼로 자른 감자 면의 진액과 나무재가 엉겨 붙어 감자병의 소독효과가 있다고 하셨다. 이미 쟁기로 밭에 작은 이랑을 만든 고랑에 재로 뒤범벅된 감자 씨를 듬성듬성 뿌리고 가시면 나는 자른 감자 면이 땅 쪽으로 향하도록 뒤집어놓고 흙을 살랑살랑 덮어주었다.

한 열흘쯤 지나면 감자 순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감자는 뿌리 열매를 먹는 작물이므로 감자 순이 너무 많으면 감자 밑이 안 든다고 가장 튼튼한 감자 순 두서너 개만 남기고 잘라주었다. 외양간과 돼지막의 두엄을 아버지는 웃거름으로 감자 순 사이사이에 뿌려주면 감자순은 몰라보게 잘 자라서 감자꽃도 피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조석으로 감자꽃을 따셨다. 감자는 뿌리채소류작물이기 때문에 꽃으로 영양분이 가면 감자가 튼실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수시로 김을 매고 북주기를 하면 감자농사는 끝났다.

이렇게 농사를 지은 감자는 그 당시는 유일한 농사꾼들의 새참거리여서 어머니가 동네아주머니들과 밭을 맬 때는 나와 동생은 감자를 캐다가 껍데기를 숟가락으로 벗겨 가마솥에 쪄서 나는 대바구니에 찐 감자를 동생은 큰 주전자에 시원한 샘물을 들고 가서 아주머니들에게 찐 감자를 새참으로 드리기도 했다.

감자 수확이 끝나면 모내기가 이어진다. 어머니는 모내기할 때 놉들의 허기진 점심 반찬을 감자로 고등어나 갈치조림을 만들어 푸짐하게 내놓으셨다. 궂은날에는 감자전을 부치고 사카린을 가미하여 꽁보리 볶은 것을 별미로 우리 형제들에게 주시면 정답게 둘러앉아 맛있게 먹었다.

그 시절 여름옷은 모시나 삼베가 대부분이었는데 여름 날씨에 눅눅함을 방지하고 까슬까슬하며 선선함을 위하여 어머니는 조금 썩고 무른 감자를 골라서 물과 함께 항아리에 채워 발효시켜서 앙금을 걸러내어 갈대 돗자리 위에 널어 고실고실하게 말려 옷에 풀을 먹일 때 사용하는 전분가루를 만들어 풀감 재료로 사용하시거나 음식 재료로 사용도 하셨다. 알갱이가 너무 작아 먹을 수 없는 감자는 어머니는 간장에 조려서 감자조림을 만들어 밑반찬으로 내놓으면 식구들은 포도송이 크기의 별미 감자조림을 어금니에 올려놓고 씹으면 감자가 툭 터지면서 간장의 향과 감자 맛이 어우러져 계속 먹게 되는 밥도둑 반찬이었다.

이처럼 감자는 작게는 가정에서 넓게는 인류 전체에 자연환경과 사회적 상황에 따라 식생활 문화를 변화시켰다. 국가 간 감자 재배의 과학적 영농방식과 유통경제의 공유는 감자 수급조절과 국제경제의 한 축으로 거래가 활발해졌다.

이런저런 생각이 나를 고향 집 마루까지 데리고 왔다. 이젠 부모님이 안 계셔서 감자 조리는 냄새도 없고, 걸쭉한 감자탕도 먹을 수 없다. 득실거리던 형제들도 없다. 어느 사이 마루 기둥에 기대어 졸다가 꿈속에서 손자가 먹던 감자 스낵을 빼앗아 먹다가 잠을 깨니 해는 중천을 지나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모든 것이 지나가고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허무감이 씨감자에 얽힌 추억을 떠오르게 했다.

(2019. 5.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