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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이의
ㆍ작성일	2009-10-12 (월)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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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집
남편의 집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이의

모든 물질은 나름대로 환경에 적응된다는 걸 세월이 말해 줍니다. 사람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에 띠는 변화는 당황스럽습니다. 한 달이면 서너 번은 전주와 경기도 성남을 오가는 주말부부가 된 지도 3년 반이 넘었으니 익숙할 만도 한데 생소한 일이 어느 구석에서 삐져나올지 몰라 긴장하게 됩니다.

경기도 광주시 시스모 빌라가 내 집이기도 한데 주방에 들어서기 겁이 납니다. 남의 집 부엌에 들어간 듯 무엇이 어디 있는지 몰라 찾느라고 시간을 허비하기도 하고, 눈에 선 그릇이 주인 노릇을 하는 것 같아 껄끄럽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거실이나 방이 전시실로 둔갑한 듯 그림이며 사진이 벽 따라 걸려있습니다. 마치 60년대의 농촌 거실 풍경을 재현해 놓은 것 같아 눈이 설어 보입니다. 그런데 그 환경이 횟수를 거듭하며 보는 재미가 쏠쏠 해지며 어떤 변화가 있나 기대감도 생깁니다. 그림의 위치가 바뀌기도 하고 사진 속 인물이 잊었던 과거의 이야기를 준비하고 기다리기도 합니다. 연출자가 할 일 없어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가 아니란 걸 알고 있는 난 가슴이 짠해옵니다. 집안일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던 남편이 아내의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서가 아니란 것도 압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대개의 경우 어느 집이든 여자의 전화통화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집에 걸려오는 전화는 거의 남편을 찾는 소립니다. 마당발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만 봐도 알 정도지요. 사람 가리지 않고 어떤 사람하고도 잘 지내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하면 사람은 누구나 좋은 면이 있기 마련이라고 얼버무립니다. 이런 사람이니 나이를 먹어도 불러내는 사람이 많은데 집안을 나름대로 변화시키고 있는 그 마음을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습니다.

주말이면 가끔 남편 친구의 전화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혼자 있는 남편을 걱정합니다. 잔소리하는 마누라가 없어 더 편하고 자유스러울 거라고 너스레를 떨지만 미안하여 가슴이 내려앉습니다. 마누라가 해주던 밥을 손수 해 먹으려니 얼마나 스산하겠습니까. 자신보다 주위를 배려하는 심성이 노년을 이렇게 보내게 한 것 같으니 그냥 감수하는 수밖에. 아빠가 어렵고 까다로운 사람이었으면 딸이 언감생심 꿈도 못 꾸었을 겁니다. 이러한 사랑의 파장이 미래를 아름답게 열 수도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전주에 내려오기 전까지 무공해 채소를 즐거운 마음으로 길러 먹었지만 남편의 큰 도움은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나를 대신해 말없이 채소를 기르며 주말을 기다립니다. 8월 마지막주말 집에 도착하니 집 앞 마당에 널려있는 마른 고추가 너무 고와 탄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고추를 보고 손수 말려도 봤지만 이토록 붉은 색이 투명하게 환상적으로 빛나는 색깔을 처음 대했습니다. 고추를 말린 사람의 마음을 훔쳐본 듯 내 마음도 따뜻해졌습니다.

엄마가 집에 가는 주말이면 아들과 딸네 식구가 모입니다. 남편은 손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집안을 깨끗이 청소하며 기다립니다. 그러다 손자들이 오면 세상에 자기만 손자가 있는 듯 정말 귀여워합니다. 그러다가도 갈 시간이 다가오면 빨리 보내라고 눈치를 줍니다. 손자들의 재롱이 아무리 귀여워도 한편으론 귀찮은 마음이 생김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가운 것이 개구쟁이 손자를 사랑하는 방법인 모양입니다. 그런데 우리 형제들을 기르신 할머니할아버지는 귀찮은 내색 한 번 안 하셨는데, 이도 세월 이 가져다준 변화인 모양입니다.
이런 와중에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속내를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전에는 무심히 지나쳤던 사소한 말에서 사랑의 파동이 가슴으로 와 닿는 걸 알아차리기도 했습니다. 손자가 할머니를 귀찮게 하면 할아버지의 꾸짖는 소리가 가슴에 잔잔한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행복이 이토록 가깝게 있다는 것을 전엔 왜 몰랐을까요? 이래서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만 열면 주위에 널려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많은 부부가 한 날 한 시에 죽기를 원하지만 원한다고 되지 않는 것 중 하나가 그것입니다. 죽는 데에는 순서가 없으니, 그 사람은 식 습관이 건강상 아주 좋은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채식을 좋아하고 많이 먹어도 살이 찌지 않으니 오래 건강하게 살 것입니다. 요즘의 요리학원 수강생 중 남자도 꽤 있다고 합니다. 어쩔 수 없이 혼자 사는 남자들이 많다보니 생긴 현상이랍니다. 그래서 이 남자도 요리학원에 등록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혼자 사는 연습을 미리 해 보는 것도 행복이라고 억지 위로를 하기도 합니다.
2, 3년만 있으면 모든 게 제자리를 찾을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어찌 변할지 예측할 수는 없어도 지금 같은 마음으로 산다면 서로가 편안하리라고 생각됩니다. 상대방이 없어도 아쉬운 게 아니라 없어도 있는 듯 있어도 없는 듯 그렇게 자연과 닮은 노년을 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