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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ssay
'행촌' 에세이모음
작성자 김성은
작성일 2020-02-26 (수) 08:46
홈페이지 http://crane43.kll.co.kr
ㆍ추천: 0  ㆍ조회: 93      
열여덟 번째 2월
열여덟번째 2월

신아문예대학 목요야간반 김성은







졸업식날 아침, 학생회장 소윤이가 나를 찾았다.

"선생님, 밤새도록 썼어요. 읽어 보세요."

점자가 찍힌 종이 두 장을 수줍게 내밀었다. 중학교 과정까지 일반학교를 다녔던 소윤이는 우리 학교에서 3년을 공부했다. 유치원 꼬마가 한 자 한 자 한글을 익히듯 처음부터 점자를 배웠다. 남다른 의지로 영어점자까지 섭렵한 소윤이가 한 점 한 점 고심하여 찍었을 편지에는 '선생님, 이제 매일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많이 슬퍼요.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라고 씌어 있었다. 콧날이 시큰했다. 코로나19 사태로 가족들의 입장도 허용되지 않은 조촐한 졸업식이었다. 재학생 대표의 송사와 학생 회장의 답사가 낭독되고, 각종 상장 수여와 교가제창으로 간소한 절차가 진행됐다.

 2002년 3월, 나는 떨리는 가슴으로 교단에 섰다. 성인 학생들이 버거웠고, 선배 교사들이 어려웠다. 나와 성격이 안 맞는 동료라 할지라도 우선은 밝게 인사해야 마땅한 신입의 기강을 미처 몰랐고, 45분 수업을 위해 90분 이상의 준비 시간이 필요했다. 그 때 익산은 내게 외딴 섬이었다. 안내견 강산이를 제외하고는 대화 나눌 친구 하나 없던 적막한 무인도였다. 동생 영선이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난 익산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으리라. 지금은 하늘 나라에 있는 안내견 강산이도 내 든든한 보호자였다. 강산이와 30분 가량을 걸어 출퇴근하는 길에서 사람과 마주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대중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소도시 사람들에게 자가용은 필수였으므로 그 시간에 한적한 길은 오롯이 내 차지였다. 정류장까지 인적 없는 길을 걷고 한산한 버스를 탔다. 안내 방송에 귀를 기울였다가 보육원 앞에서 내리면 하루 일과가 시작됐다.

건조한 공적 관계 속에 떠 있는 익산이라는 섬은 내게 생존 이상의 그 어떤 의미도 되지 못했다. 놀토에는 무조건 서울행 무궁화 열차를 탔다. 세 시간을 꼬박 의자 밑에 엎드려 있던 강산이는 영등포역에 내릴 때쯤 되면 참았던 숨을 토하듯 기지개를 폈다. 서울 집에서는 맛있는 식사와 개운한 사우나가 가능했다.

친구들을 만나 영화를 보러 나가기도 했고, 동생들과 동네 공원을 산책하기도 했다. 비로소 사람 사는 동네 일원으로 부활한 느낌이라고 표현하면 맞을까? 출근하는 토요일 오후 시간은 길기만 했다.

따사로운 햇살도, 돈도, 시간도, 나가고 싶은 마음도 다 있었지만 갈 곳이, 함께 할 친구가 없었다. 익산시 금강동에 위치한 내 공간에는 낮잠에 빠진 강산이 코고는 소리와 녹음 도서의 기계음만 가득했다. 타지에 있는 시각장애 친구들과 전화로 수다를 떨고, 강산이랑 산책을 하고, 이웃 교회 꼬마들과 몇 마디 주고 받으면 주일 오후가 저물었다.

 학생들보다 내가 더 방학을 손꼽아 기다렸고, 개학이 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그랬던 방학들이 쌓여서 나는 오늘 고등부 17회 졸업생들과 작별했다. 나를 스쳐간 제자들이 특수교사가 되기도 했고, 안마사가 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나도 가정을 꾸렸고, 아이를 낳았다. 장애인활동 지원제도가 마련되어 일상 생활에 필요한 도움 인력을 얻었다. 유주의 양육을 위해 서울 친정 부모님이 우리 아파트 이웃 동으로 이사를 오셨다. 그 뿐인가? 신아문예대학에서 인연을 맺은 존경하는 스승님과 문우님들이 계시고, 속상할 때 내 얘기를 들어주시는 다정한 벗님들이 이젠 내 곁에 있다. 무엇보다 내 운명공동체가 된 남편이 있고, 삶의 의미가 되어 준 유주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얼음판 같던 생존의 섬이 안원한 아랫목이 되었다.

 졸업식이 끝나고 하교 통학 차량이 교문을 빠져나가자 운동장이 텅 비었다. 또 한 학년도를 보냈다. 퇴근 준비를 하는데, 선배 문우님께 전화가 왔다.

 "집에 가는 길에 잠깐 들를 수 있어? 좋은 거 하나 줄게. 유주 갖다 줘."

큰언니 같은 문우님이 친근하게 말씀하셨다. 멋진 인생 선배로 본이 되어 주시는 작가님은 글만 잘 쓰시는 게 아니었다. 언제 배우셨는지, 직접 구운 맛있는 파운드 캐잌을 건네주셨다.

안전한 통근을 책임져 주시는 활동지원 선생님은 종종 뜨거운 차 한 잔으로 지친 내 목을 적셔 주시는가 하면 달콤한 과일을 챙겨 주신다.

"선생님, 사랑해요."라고 말 해 주는 학생이 있고, 서로의 일상을 즐겁게 나눌 수 있는 마음들이 있는 곳, 전북 익산은  정겨운 내 고향이 되었다.

                                                                                          (2020.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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