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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ssay
'행촌' 에세이모음
작성자 김학
작성일 2008-08-25 (월) 10:47
홈페이지 http://crane43.kll.co.kr
ㆍ추천: 0  ㆍ조회: 2964      
하여가와 단심가
하여가(何如歌)와 단심가(丹心歌)
- 5백년 고려의 수도 개성 방문기(3) -
                                            김 학

此亦何如彼亦何如(차역하여피역하여)
城隍堂後垣頹落亦何如(성황당후원퇴락역하여)
我輩若此爲不死亦何如(아배약차위불사역하여)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 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하여 백년까지 누리리라
                                  -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 -

此身死了死了一百番更死了(차신사료사료일백번갱사료)
白骨爲塵土魂魄有無也(백골위진토혼백유무야)
鄕主一片丹心寧有改理歟(향주일편단심유개리여)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 -

 어느 신문의 신춘문예나 백일장 시조부문 최종심에 이 두 작품이 올라왔다면 심사위원들은 어떤 작품을 당선작이나 장원으로 뽑을까? ‘하여가’와 ‘단심가’를 읽을 때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혼자 빙긋이 웃는다.
사실 ‘단심가’없는 ‘하여가’나 ‘하여가’없는 ‘단심가’는 독자의 눈길을 끌지도 못할 것이고 의미도 없을 것이다. 용호상박의 맞수, 역사의 라이벌이 상대의 심중을 헤아려 보려고 이런 시조를 읊었으리라. 두 작품이 장이야 멍이야 식으로 맞물려 있기에 우리의 관심을 끌게 된 것도 사실이다. 우리 조상들은 죽거나 죽여야 하는 정적끼리도 이처럼 멋진 승부를 겨뤘던 것이다.
칼잡이 이방원은 1367년생이고 붓잡이 정몽주는 1337년생이니 정몽주보다 이방원이 30년이나 후배다. 그런데 칼잡이 이방원이 붓잡이 정몽주 못지않게 멋진 ‘하여가’란 시조를 지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정몽주를 만나 회유할 때 활용하려고 이방원 스스로 이 시조를 짓는데 몇날 며칠이나 걸렸고 또 얼마나 오래 다듬고 다듬었을까? 포은 정몽주는 원래 유명한 선비이니 ‘하여가’를 듣고 그 자리에서 즉흥시로 ‘단심가’를 읊은 게 아닐까? 이 시조를 읊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선죽교에서 이방원이 딸려 보낸 조영규(趙英珪)의 철퇴를 맞고 피를 흘리며 눈을 감았다고 역사는 전해준다. 그렇다면 정몽주의 ‘단심가’를 그때 누가 기록하여 보존했기에 이렇게 6백년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가 읽을 수 있게 되었을까?

2008년 8월 12일, 새벽잠을 설쳐가며 빗속에 찾아간 개성, 그날 오전에는 박연폭포와 대흥산성을 둘러보고 통일관에서 푸짐하고 맛깔스런 개성요리로 점심식사를 하였다. 오후에는 숭양서원과 선죽교 그리고 고려박물관을 둘러보고 돌아올 예정이었다.
먼저 숭양서원(崧陽書院)을 찾았다. 숭양서원은 1573년 조선 선조 6년에 고려의 학자 정몽주의 집터에 문충당이란 이름으로 세워져 정몽주와 서경덕의 위패를 모셨다. 그 뒤 조선 선조 8년에 숭양이란 사액(賜額)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김상헌, 김육, 조익, 우현보를 추가로 배향했다. 이 숭양서원은 대원군이 모든 서원을 철폐했을 때 남겨진 전국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일 만큼 유서 깊은 곳이다. 이 서원은 임진왜란 이전의 목조건물로 서원 건축양식의 전형적인 배치구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서 의미가 크다고 한다.
선죽교는 바로 숭양서원 울타리 너머에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정몽주는 이성계를 문병하고 돌아오다 자기 집 근처 선죽교에서 피살당한 것이다. 원래 이 다리의 이름은 선지교(善地橋)였으나 정몽주가 살해된 뒤 그의 피가 얼룩진 자리에 대나무가 솟아나서 선죽교(善竹橋)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조선왕조 정조 4년 정몽주의 후손인 개성유수 정호인이 선죽교 옆에 다리를 세워 지금의 선죽교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 다리 동쪽에는 조선시대의 명필 한석봉이 쓴 선죽교비(善竹橋碑)가 있고, 다리 건너편 표충각(表忠閣)에는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고자 조선시대 영조와 고종이 세운 표충비도 있었다. 조선의 개국에 동참하기를 거부하고 목숨을 잃은 정몽주의 후손도 결국은 조선왕조에서 벼슬길에 나아갔으니 이걸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6백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하여가’로 유혹한 이방원이나 ‘단심가’로 거부의 뜻을 보였던 정몽주도 지금은 모두 백골이 진토로 변했을 것이다. 그때 정몽주가 ‘단심가’가 아니라 ‘OK하여가’로 응답했더라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왕조시대에는 왕씨 고려를 무너뜨리고 이씨 조선을 세우는 것이 이른바 역성혁명(易姓革命)이다. 하지만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게 그 시대의 불문율이었다. 그런데 지금 민주주의 나라에서는 4,5년마다 투표로 임금이나 다를 바 없는 대통령을 새로 뽑는다. 그런데도 이 시대에 왕조시대의 충절의식을 갖고 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지금은 ‘하여가’와 ‘단심가’가 서로 악수를 하는 시대려니 싶다.

                            (2008.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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