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땀이 흐른다. 부체나 선풍기 바람도 잠시일 뿐 흐르는 땀은 그칠 줄 모른다. 사람들은 올여름 더위를 살인적인 무더위라며 손사래를 친다. 연일 지속되는 고온으로 생체리듬이 흐트러지고 매사 권태를 느낀다. 생활하기에 쾌적한 온도는 C26도-C 29도가 알맞다고 한다. 그런데 평균 C7-C10도가 오르내리니 심한 스트레스가 쌓여 심신이 피로하다. 그래서 그런지, 가을이 그리워 종종 코스모스 길을 걷던 추억이 떠오른다.
엊그제 기다리던 가을의 문턱, 처서가 지났다. 바람결에 가을의 향기가 흐른다. 갓 피어오르는 꽃잎이며, 짙어지는 나뭇잎, 무르 익어가는 오곡백과의 황금빛 토실한 몸매에서 성큼 다가오는 가을의 선선함이 느껴진다. 여기에 태풍 솔릭이 곱게 지나가며 비를 뿌려 주위가 깨끗하고 산뜻하다. 아직도 한낮의 열기는 누그러들지 않았어도 아침저녁으로는 활동하기에 적당하다.
더위에 시달린 몸을 추슬러 보려고 구암 선생 '쑥뜸치료법'을 배웠다. 집에서 부부가 상호 쑥뜸치료를 하고 서둘러 전주천 걷기에 나섰다. 불어오는 공기가 신선하다. 물소리 바람소리가 화음을 이루어 듣기 좋다. 영롱한 햇빛 속에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농염해진 갈대숲 은빛 머릿결 바람에 휘날리니 흰 구름 속을 걷는 기분이다. 움 추렸던 꽃잎들 아침이슬 머금고 활기 넘친다. 떼지어 나르는 잠자리며 지저귀는 새들의 노래 소리에 한결 기분이 좋다. 바구멀 길가에 널따란 호수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자맥질하는 오리, 잉어, 날피리, 가물치들의 떼지어 노는 모습에 발길이 멈춰진다. 마치 생존경쟁에 지친 인간들을 비웃듯 끼리끼리 어울려 평화롭게 떼지어 논다. 갑자기 다람쥐처럼 생긴 동물이 잽싸게 나타나니 평화롭던 그들 모두는 도망처 버리고 침략자들만의 곡예를 펼친다. 수달이라 부르는 천연기념물이다. 이렇듯 시냇물은 모두를 품은 체 유유히 흐른다.
조용히 흘러내리는 물길따라 걸어가며 심호흡을 깊게 해본다. 맑은 공기가 폐부에 깊게 흘러 오감을 자극한다. 상쾌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의 발길이 늘어간다. 주변 아파트에서 나온 어린이부터 남녀노소 등 다양한 벗들이다. 여명에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은 나이가 지긋한 노년층이 많다. 사회와 가정에 소임을 다하고 건강과 마음의 여유를 찾으려는 자기 수양일 것이다. 남자보다 여성이 많다. 서로 반가운 아침 인사를 나눈다. 즐겁게 웃고 반기다 보면 몸과 마음에 엔돌핀이 돈다. 부지런한 아낙들은 새벽시장에 산책 겸 아침 장보기를 다녀온다. 들고 메고 이고, 혹은 자전거에 싣고 달려가는 사람들이 낯설지 앉다. 화산공원에 오르는 길에 다다르면 다양한 차림의 사람들을 만난다. 패션에 맞추어 멋을 부린 사람, 양손에 운동기구를 들고 오는 사람, 사색하며 걷는 사람, 이어폰을 끼고 걷는 멋쟁이 아가씨, 형형색색의 애완견과 동행하는 사람,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는 사람, 모두 희망이 넘친다. 광장에서 생활체조를 즐기는 남녀노소, 음악에 맞추어 흥겹게 몸을 놀리는 등 예사롭지가 않다.
아침운동으로 등산이나 달리기를 권하는 사람이 많다. 달리기나 등산은 어찌 보면 건강과 마음의 싸움이다. 언제부터인가 피로가 쌓이거나 힘이 부치면 회복이 쉽지 않다. 그래서 체력소모가 적은 산책은 나에게 적당한 운동이다. 젊은 시절 경쟁심이나 분발심에서 격한 운동을 즐기기도 했지만, 지금은 마음과 몸이 제대로 움직여 주지 않으니 여건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 걷고 쉬며 사색을 한다. 핑계 같지만 여유를 가지고 휴식과 힐링을 동시에 할 수 있다. 또한 '눈과 귀로 보고 듣고 걸을 수 있는' 사색의 도우미다.
즐겁게 걷다 보니 진북교 옆 귀목나무 밑에 다다랐다. 이곳은 친구 중만과 셋이서 자주 들리며 보살피던 나무인데 벌써 성목이 되어 우람차다. 그 어리던 나무가 그늘이 되고 버팀목으로 우리 곁을 지키는 보호수가 되었다. 지난 삶을 되돌아보면 '입신양명' 어느 것 하나 변변치 못한 나에게 무언의 가르침을 준다. 변명 같지만 끝을 맺지 못하는 나의 우유부단한 성격이 불러온 결과다.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엇하랴. 서신다리 밑 돌의자에서 잠시 쉬며 한용운 시인의 '님의 침묵'을 낭송해 본다. 관객을 불러 모을 것도 없다. 흐르는 물과 어우러진 갈대숲에 잠든 벗들을 깨우고 목청을 다듬어 다리 밑에서 낭송하면 울림이 자못 화음을 이루어 듣기 좋다. 이렇듯 좋은 시를 남기신 한용운 시인의 고결한 뜻을 생각하며 내 초라한 삶을 일깨운다. 이제부터라도 게으름을 피지 말고 미루어온 아침 산책으로 연약해져 가는 심신을 단련할 일이다. 혹자는 달리기를 인생길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비유가 적절한지 따져 볼 생각은 없다. 나로선 답을 내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달리며 어찌 갈대숲에서 숨바꼭질하는 족제비며 다람쥐, 물가 오리떼들의 여유로운 야유회를 즐길 수 있을까? 한가롭게 걷다 보면 이들이 다가와 함께 즐길 수 있어 사라져 가는 기쁨을 되찾을 수 있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다 보면 아파트 담장에 철 지난 장미가 외로이 피었다. 게으름에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인 꽃잎이 나약해 보인다. 긴긴 무더위에 한 눈 팔다 늦게 가슴 풀어 보이려니 부끄러운 듯 얼굴이 더욱 붉다. 실바람에 가냘픈 몸을 흔들며 교태를 부리듯 다가오는 얄미움을 어찌 못 본 척하랴. 쓸쓸히 핀 그 붉음은 못다한 그 정열이 식어지지 않아 보인다. 그래도 꽃 중의 화려함은 장미가 으뜸인 것 같다. 얄밉게 떠난 그녀를 닮아 밉게 보이지만, 이 모두 산책길에서 얻게된 여유다. 아침의 산책은 정신이 맑아지고 마음에 고요가 흐르는 힐링의 시간이다.
공지사항
문화 류씨 이야기
운조루 11대 정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