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바람이 가을을 재촉하던 날, 국화꽃축제장에 갔습니다. 일행은 모세경로대학 학생들이었습니다. 관광버스 3대에 오른 사람들은 인솔자와 봉사자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예순다섯 살 이상의 노인들이었고, 아흔다섯 살의 극 노인도 있었습니다.
고창읍 석정리에 조성된 국화 밭은 30만 평의 땅에 3백억 송이의 꽃밭이라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국화 밭 같았습니다. 그 넓은 땅을 가득 메운 국화는 포기마다 황홀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노란색, 분홍색, 하얀색으로 곱게 꾸며진 송이마다 국화만이 지닌 진하고도 달콤한 향기를 날려 탐방객의 발길을 붙잡았습니다. 꽃술을 활짝 열어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꽃들 사이로, 열릴 듯 열릴 듯하며 꽃망울로 머물러 꽃술을 숨기고 있는 송이가 더 눈길을 끌었습니다. 일행은 한 송이의 꽃이라도 더 가슴에 담으려고 분주히 누볐습니다. 거동이 불편한 아흔다섯 살의 할머니도 국화의 향기에 힘이 솟는 듯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습니다.
국화는 가을의 대표적인 꽃입니다. 가을이 열리면서 피기 시작하여 가을이 떠날 때까지 찬바람을 마다하지 않고 절개를 지키며 향기를 날립니다. 국화는 종류도 다양합니다. 크기에 따라 대국, 중국, 소국으로 나누고, 색깔로도 분류합니다. 향기만큼은 크기와 아름다움에 반비례하는데, 소국일수록 은은한 향기가 오래 간다고 합니다.
국화 밭 중앙에 집채보다 더 큰 바윗돌이 바위로 된 받침대 위에 놓여있었습니다. 얼추 50-60ton쯤 되어 보였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옮길 수 없을 듯싶었는데, 어떻게 옮겨서 그렇게 조화롭게 설치했는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 바윗돌에 미당 서정주 시인의 시 ‘국화 옆에서’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봄부터 솟적새가 울고, 천둥도 먹구름 속에서 울었노라고 노래한 시였습니다. 그 시는 국화의 향기만큼이나 진하고 아름다운 그리움으로 가슴에 스며들었습니다. 나는 그 시를 감상하면서 미당 시인의 시정(詩情)에 정신이 혼미하도록 마음이 끌렸습니다. 시인의 음성이 국화향기에 실려 바람에 날리는 것 같아서 한없이 허공을 바라보았습니다. 시인은 이렇게 방대하고 아름다운 국화 밭이 조성될 것을 예상하여 이 시를 쓴 것 같았습니다. 시인은 이 세상에 없지만 그 정신은 살아서 영원히 국화를 노래할 것 같았습니다.
국화 밭 언저리에는 수 백 평이 되는 비닐하우스가 있었습니다. 하우스 안에는 국화전시장이 꾸며져 있었습니다. 하우스 안에 잠겨있는 진한 국화향기와 더불어 그림처럼 꾸며진 작품들이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국화송이로만 꾸며 놓은 우리나라 지도는 보기 드믄 예술작품이었습니다. 산맥과 강이 선명하게 나타나고 살아 있는 국화지도였습니다. 각종 새들의 모양, 짐승들의 모양은 살아 숨 쉬는 듯 보였습니다. 도래방석으로 삼층을 꾸민 작품은 신비에 가까웠습니다. 가느다란 줄기를 올려 멍석처럼 1층을 만들고, 1층에서 2층으로 올려 도래방석을 만들고, 2층에서 3층으로 올려 원형으로 조화롭게 꾸민 정교한 작품은 농업기술센터 연구원의 피와 땀과 눈물의 결정체로 보였습니다. 하우스 안의 작품들은 모두 신비스러워 보였고, 인간의 능력도 어느 한계까지는 높은 경지에 이르리라 느꼈습니다.
가을이 오면서 피어나는 국화는 가을이 떠날 때 함께 떠날 것입니다. 가을이 떠나고 국화가 제 모습을 감추면 겨울이 오고 또 한 해가 지나갑니다. 국화송이에 코를 대며 향기를 맡던 아흔다섯 살 할머니는
“내가 이렇게 천국 같은 국화 밭을 또 올 날이 있겠느냐?”
하시며 주저앉아 아쉬워하고 있었습니다. 나이 들면 국화처럼 떠날 날이 가까이 오리니, 그래서 아흔다섯 살 할머니는 더 아쉬워하는 듯싶었습니다. 향수(鄕愁)처럼 밀려오는 국화향기를 마시며 즐기던 하루해도 서산머리에 기울고 있었습니다. 가을의 하루는 너무 짧았습니다. 가을의 한 철도 짧은 것 같습니다.
아흔다섯 해의 세월도 지나고 보면 짧기만 합니다. 짧게 살면서도 향기를 날려 우리를 즐겁게 하는 국화처럼, 나도 남에게 사랑을 주는 향기 나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천국 같은 국화 밭 한 가운데 선 일행 앞에, 가을빛이 밴 저녁노을이 밀려왔습니다. 애틋한 하루를 보내 돌아서야 했습니다. 돌아서는 등 뒤로 300억 송이가 뿜어내는 국화향기가 따라오는 듯싶어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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