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례 운조루(雲鳥樓) 공식 홈페이지 ▒

ㆍ작성자	전용창
ㆍ작성일	2018-08-24 (금)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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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추천: 0 ㆍ조회: 439

비 오는 날의 수채화
비오는 날의 수채화

꽃밭정이수필문학회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전 용 창

오랜 가뭄 끝에 단비가 내리고 있다. 나는 비를 좋아한다. 비 오는 날이 유일하게 하늘과 땅이 맞닿는 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늘의 기운이 빗줄기를 타고 내려온다 생각하니 반가워서 집에만 있을 수 없었다. 늦은 오후에 친구와 함께 산책을 나갔다. 우리가 가는 길은 삼천 천 제방 길이다. 그 길은 한적하고 차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좋다. 둘이서 우산을 받쳐 들고 걸으니 「우산」이라는 동요가 생각났다.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 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 파란 우산∼ 깜장우산∼ 찢어진 우산∼ / 좁다란 학교 길에 우산 세 개가 / 이마를 마주대고 걸어갑니다.

이른 아침도 아니고 우산 셋도 아니지만 둘이는 그렇게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노래를 부르며 걸었다. 그때는 천으로 만든 우산은 귀하고 나무 살에 기름을 바른 종이우산과 비닐우산이 전부였다. 바람만 세게 불면 뒤집혀서 망가지니 우산도 없이 비를 맞고 학교에 간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비는 계속하여 꾸준히 내린다. 오랜 가뭄에 시들시들 말라가며 잎사귀를 들 힘도 없이 축 늘어진 단풍나무, 자귀나무, 달맞이꽃들이 오므라진 잎을 조금씩 펼쳐 보이고 있다. 생명수를 받아먹고 소생한 것이다. 누가 이렇게 드넓은 곳에 물을 줄 수 있단 말인가? 여기저기서 생명수를 받아먹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하나님은 다른 나무를 감거나 풀들을 가리고서 혼자만 이슬을 받아먹은 얌체 같은 칡넝쿨에게까지도 단비를 내려주었다. 좁은 텃밭에 물 주기도 쉬운 일이 아닌데, 이 넓은 곳에 빗물을 골고루 뿌려주려면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갈까? 햇빛과 물 그리고 흙이 있기에 모든 생물이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닌가? 햇빛과 물을 값없이 받고 흙에서 양식을 얻으며 살아왔음에도 감사할 줄 모르고, 심지어는 욕심을 부려 곳간에 쌓아두는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려고 가뭄도 주고 홍수도 주는 게 아닐까?

나는 친구에게 난센스 퀴즈를 냈다.

"비는 온도가 일정한데 몇 도인 줄 아는가?"

"봄에 내리는 비는 10도쯤 되고, 지금처럼 한 여름에 내리는 비는 20도쯤 되지 않을까?"

나는 재차 물었다.

"비는 언제나 온도가 일정하다니까."

그러자 그는, 그럼 평균 잡아 15도라고 했다. 나는 '도미'라는 가수의 「비의 탱고」를 들어봤냐고 물으며 그는 사람들이 비의 온도를 잊어버릴까 봐,

"비가 '오도'다, 비가 오도다~"라고 노래를 부른다고 했다. 둘이서 모처럼 함박웃음을 터트렸다.

이제는 친구가 나에게 퀴즈를 냈다.

"사람이 일생동안 가장 많이 하는 소리는 무엇이지?

나는 서슴치 않고 "엄마"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그는 나에게 "숨소리"라고 했다. 나는 그의 말을 인정하며 그렇지, "생명의 숨소리."

나는 오늘 비가 내리는 제방 길을 걸으며 생명의 숨소리를 들었다. 아니 그것은 숨소리라기보다 기쁨에 감격하는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였다.

영화로운 조물주의 오묘하신 솜씨를 / 우리들의 무딘 말로 기릴 줄이 없어라 / 봄비 맞아 움터 나는 나뭇잎을 보아도 / 햇볕 안고 피어나는 봉오리를 보아도.

비를 맞고 옷이 흠뻑 젖었어도, 너무 걸어서 다리가 아파도, 내 마음은 물 찬 제비처럼 날아갈 것 같았다. 오늘 감사를 한 모든 나무들의 모습이 하나님이 빗물로 그린 살아있는 '생명의 수채화'처럼 보였다. 밤에는 태풍 '솔릭'이 북상한다는데 제발 어린 나무들이 강풍에 상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이 보금자리를 잃지 않도록 조용히 지나가기를 바라며 잠자리에 들었다.

(2018. 8.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