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이었다. 가끔 만나 친분을 나누던 지인이 팔을 다쳐서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도라지꽃과 강아지풀, 망초꽃, 벌개미취 꽃을 섞어 야생꽃다발을 만들어 문병을 갔다.
"어머나! 엄마, 너무 예쁘다. 그렇죠? 아우! 이 꽃은(망초꽃) 달걀 후라이 해놓은 것과 똑같아서 우리들은 달걀 꽃으로도 불렀는데, 엄마, 어디다 둘까요? 이 쪽, 아니면 저 쪽?"
병원에 입원한 환자도 애를 쓰지만 간호하는 집안 식구들도 힘이 든다. 엄마를 두어 시간 보아 드릴 테니 쉬었다 오라는 내 말에 딸이 아니고 며느리라고 했다. ‘엄마’라는 호칭 때문에 물어보지도 않고 딸이라 짐작했었는데 약간 당황스러웠다.
"그럼 엄마, 아주머니! 저 잠깐 다녀올게요. 수고 좀 해주세요."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며느리는 나갔다. 매우 정다워 보이기도 하고 좀 버릇없어 보이기도 했다. 점잖은 자리에서는 민망할 때가 많다고 묻지도 않았는데 시어머니가 말했다. 하긴 예로부터 여시(여우)하고는 살아도 찍소(고집 센 황소)하고는 못산다고 했었다. 격의 없이 편안하게 지내면 그도 좋을 일이다.
언어예절은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는데 지켜야 할 공손하고 품위 있는 질서다. 일일이 따져본다면 우리나라 말처럼 복잡한 언어도 없다. 장소, 상대, 나이, 직장 동료, 친분에 따라 수시로 달라져야 하니 복잡하기 그지없다. 병실에서 그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했던 말은 분명 이치에 맞지 않지만 지금 현실에서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멀게 느껴지는 고부 사이를 좁혀주어 좋다는 사람도 많다. 사실 ‘엄마’는 ‘딸’이 사용해야 하고 ‘어머님’은 ‘며느리’가 써야한다는 규정은 없다. 살기 힘든 세상살이에서 말이라도 따뜻하고 기분 좋게 서로 사용한다면 한결 부드러운 사회가 될 것이기에 사람들은 가끔 하얀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자기의 이익을 구하기 위하여 하는 거짓말이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는 선의의 거짓말이다.
며칠 전에 시내에서 친정 사촌 형님을 만났을 때,
"어머나, 형님, 여전히 제가 처녀 때 보던 모습으로 계시네요. 세월이 비켜 갔나 봐요."
형님의 얼굴이 순간 밝아졌다. 내 마음은 ‘거짓말’이라고 하고 내 입은 ‘참말’이라고 우기고 있었다. 물론 상대방도 내 말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더 잘 알고 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급한 상황에 슬기로운 거짓말은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할 수도 있으니 한국 사람은 거짓말을 하나씩 간직하고 다녀야 한다고 했다.
일제 때 살기위한 거짓말과 어려운 처지에 놓인 타인을 위한 거짓말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참말과 거짓말 사이의 경계가 아리송하다. 지금 우리는 속은 다른 곳에 두고 입에 발린 듣기 좋은 말을 책임감 없이 수시로 쏟아놓는다. 하긴 가뜩이나 싫은 사람이 말마저 듣기 싫게 한다면 얼마나 밉겠는가. 그렇다고 지나친 경어나 아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은 오히려 불쾌할 수도 있다. 말속에는 품위와 규칙이 있어야 한다.
옛날에 시집온 며느리의 말버릇이 고약해서 통 존댓말을 쓸 줄 모르는 철부지였다고 한다. 시어머니는 날마다 철부지 며느리를 가르치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루는
"어머님! 아버님 이마빡에 티끌님이 앉으시니 소시시가 보시시고 웃으시니 개시시도 보시시고 지시십니다." (아버님 이마에 티끌(먼지)이 앉으니 소가 보고 웃고 개가 보고 짖습니다) 이처럼 어른께 써야 할 존경어도 지나치면 어색하고 민망할 뿐이다.
지난주에 아들 내외가 왔다. 손녀가 돌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제 남편을 오빠라고 부른다. 여러 번 주위를 주었는데도 쉬 고쳐지지 않는다. 요즘은 연상연하 커플이 많아져서인지 보통 남편을 '얘' '너'로 부른다. 애칭은 둘이서만 부르고 타인 앞에서는 예절을 지켜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언어도 생명력이 있어 유행을 탄다. 새로 생기기도 하고 소멸되기도 하여 시대와 현실에 맞게 변해야 한다지만 이런 언어는 품위와 격을 스스로 떨어뜨리는 것이다.
예전에는 시집을 오면 아이 하나 낳기 전에 어른들은 서둘러서 택호를 지어주었다. 여자의 친정 지명을 따서 ‘용정댁’이니 ‘누른대댁’이니 하여 어디서 왔는지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친정 지명을 날마다 누군가가 불러준다는 것은 고향을 그리는 마음과 부모님을 생각 하는 마음을 떠오르게 해주고, 올곧게 살아가라는 무언의 뜻도 담고 있었다. 일종의 호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금은 택호를 지어 부르는 사람이 없다. 첫아이 이름을 따서 ‘희은이 엄마’나 ‘경수엄마’가 된다.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경수엄마’라고 불러야 한다. 어쩐지 편치 못하지만 달리 부를 언어가 없다. 그렇다고 이름을 부르고 살 수도 없어 나이 많으면 무조건 형님이라고 부른다. 조금 지나면 촌수를 전혀 가리지 못할 것 같다. 우리나라도 이미 단일민족에서 벗어나 다민족으로 들어섰으니 촌수는 따져서 어쩌겠느냐면서 당숙모까지는 아는데 그 뒤부터는 아리송하다고 젊은이들은 무조건 형님이나 아우로 통하고 만다.
우리는 날마다 누군가와 말을 하면서 산다. 할 수만 있으면 내가 하는 말이 듣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게 하려고 노력한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의 교수님은 언제나 칭찬을 숙제로 내어주신다. 숙제처럼 남을 칭찬한다? 처음에는 쑥스럽고 쉽지 않았다. 그러나 자주 하다 보니 그 효과는 열배로 돌아온다는 것을 터득한 셈이다. 무엇보다도 상대가 기분이 좋아지고 어렵던 사이도 봄눈 녹 둣 사라진다는 것을 체험했다. 그러나 어찌 늘 좋은 말만 할 수 있으랴. 때로는 쓴 소리에 마음 아프기도 하고, 바른 소리가 앙갚음이 되어 큰 화근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아주 당당하게 거짓말을 하는 통 큰 사람들도 많다. 특히 높은 분들이 더욱 그러하다. 지키지 못 할 약속을 큰소리로 말해놓고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 이들은 하얀 거짓말을 역이용하고 있다.
우리 부부는 한 번도 서로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쑥스럽기도 하지만 그런 말을 주고받아야 할 만큼 필요로 한 적도 없었다. 사랑보다는 정이나 가족의 둘레에 얽혀 그냥 살아간다고 보는 것이 옳다. 큰맘 먹고 남편에게 사랑한다고 했더니 생뚱맞은 얼굴로
"그냥 하던 대로 해. 갑자기 사랑은 무슨?" 공연한 짓을 했나 싶어 쑥스러웠는데 돌아서서 남편은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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