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례 운조루(雲鳥樓) 공식 홈페이지 ▒

ㆍ작성자	최순호
ㆍ작성일	2009-01-19 (월) 14:13

ㆍ추천: 0 ㆍ조회: 2749

괴목대신제
괴목대신제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최 순 호

추갑사(秋甲寺)로 널리 알려진 계룡산 갑사 입구에는 1600여 년쯤 된 마을의 수호신 당산나무가 있다. 해마다 그 당산나무 아래에서는 마을과 나라의 번영과 안녕을 비는 제사를 지낸다.
올해도 갑사 괴목대신제는 KBS 6시 내 고향 제작팀의 촬영 요청에 따라 제작팀이 현장에 도착하면서 더욱 바빠졌다. 시대 상황에 맞는 적합한 장소와 환경 등 마을 이장의 협조를 얻어 경운기에 제작도구들을 싣고 주연과 조연, 엑스트라까지 정하여 앞뒤 마을을 전전하다 보니 내가 제작자가 된 기분이었다.
이곳에 모신 당산신은 절에도 영향을 준다는 전설이 있어서 갑사의 스님들과 마을 사람들이 해마다 정월 초사흗날 공동으로 제사를 지낸다. 갑사의 창건과 역사를 같이한 이 괴목은 임진왜란 당시 영규대사와 800여 명의 승병들이 이 나무 아래 모여 작전을 짰다는데 지금은 그 밑동만 남아있는 상태다.
풍수설에 따르면 갑사는 뛰어난 장수는 나오지 않아도 국란을 무찌르는 문맥의 은산지라고 평하기도 하지만 산세가 험한데 비해 뜰이 온화해서 무엇이든 온화한 쪽으로 기우는 풍수라고 한다.
괴목대신제를 치를 땐 우선 마을 대표들이 모여 제관 한 사람과 축관, 집사도 선발한다. 나는 재작년 이 행사에 제관으로 선발되었다. 집사로 하여금 경비를 갹출하도록 하고 갑사 사무장과 상의한 뒤 제물을 구입하도록 하였다. 며칠 전부터 괴목에 금줄을 늘이고 장승이며 주위에도 금줄을 쳤다. 금줄을 늘인 날부터 제관은 목욕재계하고 금줄이 처진 제단 안으로는 사람들이 출입하지 않는다. 아낙네들은 떡국이며 음식을 장만하느라 분주하다.
계룡산은 민간신앙의 온상지이자 우리나라에서 빼어난 산이다. 계룡산은 백제시대부터 천신께 제향을 올렸으며, 고려 때는 풍수지리상 명승지로, 조선 시대에는 도참설과 정감록의 추앙지요 온상지로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고 그 민간신앙이 보존된 곳이다.
제삿날이 되면 제사 전에 농악대가 풍장을 치고 갑사에서부터 입제, 연 이운식을 거행한 다음 괴목대신제가 시작된다. 제물이 진설되며 풍악이 그치고 시루에 백설기를 쪄서 시루 째 올려놓고 촛불을 밝힌다. 주지 스님의 독경에 이어 주지스님과 마을 대표자가 먼저 소지를 올리고 마을 주민들과 신도, 관광객들 누구나 소지를 올린다.
괴목대신제와 노신제가 끝나고 풍악이 울리며 장승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면서 장승제가 시작된다. 갑사 입구에는 마을번영회에서 장승 촌을 새로이 조성하였다. 장승은 경계표시나 이정표의 역할과 함께 잡귀와 질병으로부터 마을 사람들을 보호해 주는 수호신이다. 때로는 개인의 소원성취를 기원하는 대상으로서의 신앙적인 성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함부로 손대지 않고 신성시 한다. ‘변강쇠전’에서 변강쇠가 장승을 땔감으로 삼았다가 액운을 당해 죽는다는 판소리 사설에도 잘 나타난다. 장승들의 표정을 살펴보면 웃음을 짓거나 찡그리는 것은 표면일 뿐 내면에는 인간이 지키고 실천해야 할 덕목들이 서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장승제가 있은 뒤 KBS의 인터뷰 요청으로 갑사 총무스님과 나는 괴목대신제의 내력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갑사는 큰 절이다보니 밤에 절 주위에 불을 밝히는 일도 큰일이었다. 한데 옛날에 이 갑사에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육중한 갑사 대문 밖 장명등에 불을 켜놓으면 하룻저녁을 지내지 못하고 도중에 불이 꺼지는 것이었다. 기름이 부족해서 그런가 하고 한 사흘 분 기름을 기름병에 넣고 불을 붙여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혹시 기름병이 새는 게 아닌지 살펴봤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래서 갑사의 스님들은 이상한지라 하루는 스님이 교대로 장명등을 지키기 위해 밤을 새웠다. 밤이 이슥해서였다. 대문 앞에서 서성거리던 스님이 잠시 용변을 보기위해 숲속에 들어가니, 장명등 불이 꺼지는 게 아닌가! 그는 급히 뛰쳐나가 근처를 살폈으나 풀벌레 소리만 들릴 뿐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이튿날엔 두 사람이 지키기로 했다. 한밤중이었다. 둘이는 긴장하고 장명등을 바라보고 있는데 얼마 안가서 졸음이 오는 것이었다. 불이 꺼지는 것 같은 예감이 들었으나 한참 후 눈을 감고 있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불은 완전히 꺼져 있었다. 그들은 달려가서 기름병을 살펴보았다. 초저녁에 틀림없이 채워 놓았던 기름병이 비어 있었다.
“그렇지. 이것은 틀림없이 도적놈의 짓이로다.”
생각하고 그 다음날은 스님들 모두가 그 도적을 잡기 위해 망을 보기로 했다. 추운 겨울밤이었다. 먼 곳에 모닥불까지 피워 놓고 교대로 나와서 장명등을 지켰다. 역시 한밤중이었다. 중이 잠에 시달려서 눈을 감을까 말까 씨름하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팔척신이 등불 가까이 와서 기름을 따르고 있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스님은 정신을 가다듬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여러 명의 스님들이 모여들어 그를 완전히 포위했다.
“그래, 불전을 밝히는 기름을 훔치다니, 대체 당신은 누구요?”
입빠른 스님이 대들자,
“나는 이 절 안에 있는 당산신이다. 사람들이 자기발치(나무뿌리)에 담배를 털기 때문에 그것을 씻어내려고 기름을 가져간 것이다. 내 원컨대 어느 여인에게 병을 앓게 하면 내가 그 병을 고쳐 줄 테니 그 대신에 전답을 좀 얻어 그 수확물로 나를 잘 섬기면 이런 일이 없을 것이다.”
하며 아랫길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 뒤 중과 마을 사람들이 의논해서 제사를 지냈는데, 이를 당산제라 하며 병이 들어 절에 불공을 드리러 오는 사람한테 불공을 드린 뒤 꼭 여기에 들러 기도를 드리게 했다. 그러면 여기에서 기도를 드린 사람들은 모두 병이 나았다. 아무리 큰 전염병이 번져도 당산제를 크게 지내면 이 마을 부근엔 병이 옮겨오질 않았다.
괴목대신제가 끝난 뒤 나는 고향의 죽마고우한테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친구야, 계룡산에 산다면서 중이 된 거냐, 도사가 된 거냐? TV 잘 봤다.”
저녁에는 텔레비전을 본 서울과 부산 등지의 친지들한테서도 안부 전화가 걸려왔다.
해마다 한 해를 시작하는 음력 정초에 사찰과 마을주민, 행사 참가자가 하나가 되어 나라와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며, 우리 선조들의 소박한 정신을 현대 감각에 맞게 계승 발전시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