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례 운조루(雲鳥樓) 공식 홈페이지 ▒

ㆍ작성자	구미영
ㆍ작성일	2008-11-12 (수) 16:32
ㆍ홈페이지	http://blog.daum.net/crane43

ㆍ추천: 0 ㆍ조회: 3007

아궁이
아궁이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구미영

21세기의 시작을 알렸던 2000년 어느 봄날, 니는 한 농부의 며느리가 되었다. 처음 시댁에 인사하러 갔을 때, 1970년대를 연상케 하는 집이 나를 놀라게 했다. '아직도 이런 집이 있구나!' 하지만 나를 더 놀라게 한 것은 부엌 안쪽에 있는 아궁이였다.‘설마 새 며느리에게 불을 지피게 하지는 않겠지.’하는 생각을 했었다.

옛날 아낙네들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 가마솥에 밥을 짓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시부모님께서는 찬바람이 부는 계절엔 꼭 아궁이에 불을 지피신다. 기름보일러가 있는데도 시부모님은 가마솥에 물을 끓여 식수를 해결하고 몸을 씻으신다. 편리한 보일러에 익숙해진 도시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이지만 나와 아이들도 그런대로 적응해 가고 있다. 가마솥 아궁이의 활활 타오르는 불꽃으로 끓여진 진한 사골국물 맛을 보고 난 뒤부터 아궁이가 싫지만은 않았다.

아궁이가 있는 부엌은 우리 며느리들의 밀회(?) 장소이기도 하다. 형님께서는 가끔 옛날 얘기를 해주신다. 예전엔 아궁이 앞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저 가스레인지조차도 없었다고 한다. 가마솥에 밥을 짓고 석유곤로를 이용해 찌개를 끓인 얘기를 해주시면서 가스레인지가 있을 때 시집온 게 다행인 줄 알라고 우스갯소리를 하신다. 하지만 가마솥 누룽지를 맛보지 못한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고 한다.

가을이 끝나갈 즈음 남편은 알밤과 고구마를 아궁이에 넣어 구워 주곤 했다. 한 번은 알밤 껍질에 칼집을 내지 않고 그대로 구워 알밤이 사방으로 튀는 일이 있었다. 튕겨진 알밤이 부엌 한 쪽에 있는 지푸라기 속으로 들어가면 큰 불이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빨리 발견해서 다행이긴 했지만 아버님의 불호령은 장작 타는 냄새만큼 매웠다.

내가 둘째 딸아이를 낳은 날, 아버님께서는 병원에 오셔서 입원비를 건네주시면서,
"셋째는 아들을 낳으면 되지!"
하며 웃으셨다. 난 병원비보다는 "딸이 더 예쁘다!"
라는 말을 기대했는데 그 바람이 눈물로 흘러 내렸다. 그렇게 작은 딸이 두 돌이 지날 무렵 아버님께서는 내게 넌지시 셋째 얘기를 꺼내셨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만 보면 아들 타령을 하셨다. 형님들에게서 손자를 셋이나 보셨으면서도 막내며느리인 내게도 욕심을 내시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시댁에 갈 때마다 아버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니 나 또한 스트레스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가야 할 곳이라 가긴 했지만 난 그때부터 아버님을 피해 다니기 시작했다.

봄과 여름엔 마당을 서성이거나 마루에 앉아 하늘의 별을 세어보곤 했다. 하지만 가을과 겨울엔 찬바람을 견디지 못했다. 아궁이로 데워진 따뜻한 방이 차갑게 얼어버린 내 마음을 녹일 수는 없었나 보다. 장작의 열기로 데워진 따뜻한 방은 포기하고 대신 아궁이가 있는 부엌에 가서 신문지를 깔고 앉아있곤 했다. 그리고선 부지깽이를 들고 괜히 아궁이 속을 쿡쿡 쑤시면서 눈물을 삼켰다.

장작보다는 종이를 태우면 연기가 더 많이 난다는 것을 알고부터 난 일부러 아궁이에 종이를 많이 집어넣곤 했다. 매운 연기를 핑계로 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난 아들을 만들 수 있는 성염색체가 없는데 왜 칠거지악(七去之惡)이란 소리까지 들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시대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아들 타령을 하시는지…….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는 남편이 미워서 내 설움은 배가되었다. 그렇게 몇 번의 계절이 바뀌고 내 나이 서른에 다리가 하나씩 붙을 때마다 나도 생각이 달라져 갔다.

아이 하나 더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게 되었고 우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아마도 장작의 활활 타오르는 불꽃에 미움과 원망을 태우면서 아궁이에서 품어져 나오는 열기가 얼었던 내 맘을 조금씩 녹였나 보다.

하루가 다르게 변덕을 부리는 기름값이 걱정되는 계절이다. 오늘따라 기름값 걱정 안하고 편하게 두 다리 뻗고 허리를 지질 수 있는 시댁의 따뜻한 아랫목이 생각난다. 다음 주말엔 그 동안 모아 놓은 파지(破紙)를 싣고 시댁에 가야겠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매서운 바람이 올해에는 어떤 모습으로 올까? 아궁이에 지필 땔감을 찾아 이곳 저곳을 헤매고 다니실 아버님에겐 그 바람이 비켜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