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저 잘 도착 했어요.”
그리곤 조용한 목소리로 다정다감하게, 때론 소곤소곤 통화를 하다가는 흐드러지게 웃는걸 보노라면 몹시 궁금하기도 하다. 헤어진 지 몇 시간인데, 도대체 무슨 비밀이야기가 저리도 많은가? 잘 도착했다는 전화 한 통화가 별 것도 아닌데 고부간에 저리도 할 말이 많을까? 전화만 오면 그저 즐거워하는 아내다.
"지선이는 차속에서도, 직장에서도, 퇴근해서도 언제나 나만 생각하고 있나봐.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궁금한 걸 어떻게 알고 어김없이 전화를 걸어주고, 문자를 보내줄까? 하는 말, 성격, 생각까지도 어찌 나와 닮았는지! 내가 아플 때 같이 아파하고, 내가 좋아하는 음식도 같이 좋아하고, 가보고 싶은 곳은 어김없이 먼저 가자고 하니, 어떻게 그렇게 내 취향과 생각을 알아내고 있을까? 항상 나만을 생각하고 있나 보다."
아내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아내는 가끔 혼자 연습을 한다. 이번 모임에 가서는 나도 남들처럼 며느리 자랑 좀 해야겠다고 중얼중얼 연습을 한다. 친구들이 모였다 하면 며느리, 딸, 사위의 별별 자랑, 별별 험담을 다 하지만 듣는 편이고 말을 한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란다. 거들고 싶지만 막상 입을 열려니 자랑할 만한 것이 떠오르지 않고, 한마디 거들라치면 망설이는 사이 말할 시간조차 주지 않는다,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고, 구체적인 자랑거리가 잡히지 않기 때문이란다. 듣기만 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혼자 빙그레 웃는다고 한다. 자랑꺼리를 내놓지는 못했어도 그저 그렁저렁 무조건 좋은가 보다. 지선이도 친구들끼리 모이면, 시어머니 이야기, 시댁 이야기, 신랑 이야기로 꽃을 피우겠지, 우리 지선이는 시어머니를 자랑할까?
“엄마, 저 이번 주 금요일에 내려 가서 뵐게요.”
이 한 통화에 아내는 또 마음부터 바쁘다. 이번 주 내려오면 몸이 약하니까 한의원에 데려가 검진을 받아보고 보약을 먹도록 해야지. 그리고 진안에 가서 수삼을 사다가 홍삼으로 내려놓았다 줘야지. 또 위가 약한 것 같으니 좋다는 천마엑기스를 만들어 줘야지. 날이 풀렸으니 백화점에 가서 옷도 한 벌 사 입혀야겠고, 다음 주 극장프로그램은 뭐 좋은 거 없을까? 지난번 왔을 때 보니까 식혜를 좋아하던데 만들어 놓았다 먹여야지.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면서 그저 즐거워할 뿐이다.
오늘은 갑자기 내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 이것이 나의 시샘이나 질투, 그렇지 않으면 아내에 대한 불만일까?
지금까지 40여년 동안이나 아내와 나는 같이 살아왔는데도, 아내는 왜 나에게는 한 번도 그렇게 싹싹하게 대해주지 않았을까? 아니다. 우리가 젊었던 시절에는 그저 먹고 살기 바빠서 아름다운 마음과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펼칠 꿈도 꿀 수 없었다. 혹시 그 보다 더 진한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어도 아내는 표현할 용기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 역시 눈치도 못 채고 지나쳐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나이가 들면 아내는 남편에게 못다한 사랑을 자식에게 준다던가? 아내가 며느리에게 주는 사랑은 아마 젊은 시절 나에게 지녔던‘사랑과 정성'을 이제야 간접적으로 표출하는 것이려니 싶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내 마음이 한없이 편하다.
아내와 며느리가 만나 하는 말과 행동을 보면서, 아들과 나는 사사건건 시비를 걸려고 안간힘을 쓴다. 옆에서 훼방을 놓으려는 것이다. 그러면 아내와 며느리는 장난끼 어린 농담으로 받아들이며,
“에이, 오빠는!”
“놀부 노릇 좀 어지간히 해.”
이런 아내와 며느리의 관계가 오래오래 변치 않기를 바랄 따름이다. 이것이 놀부와 놀부애비가 바라는 마음이다.
(2009.02.15.)
좋은 인연
전주안골노인복지회관 수필창작반 이신구
“이 선생, 내려가면 바로 전화하고, 가끔 연락 해!”
“어이, 고마웠네. 잘 있게.”
모처럼 서울 세미나에 참석하고 친구 권 선생과 헤어져 무궁화열차 좌석을 찾아 앉고 보니, 남아있는 자리는 몇 석 되지 않았다. 그런데 내 자리와 내 옆 자리도 비어 있었다. 출발시간이 가까워 오자 남은 좌석은 모두 채워졌는데, 내 옆자리 손님은 오지 않는다.
어떤 분이 오시려나? 나이 드신 노인일까 아니면 젊은 분? 남자일까 아니면 여자일까? 내 옆자리는 손님이 없는 지도 모르지. 혹 다음 역에서 타는 걸까? 발차시각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데도 내 옆은 여전히 비어있었다.
기왕이면 예쁜 여성이면 더 좋겠다. 옆자리 손님이 오면 무슨 말을 건넬까? 옆자리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여행을 하면 지루하지 않아 좋겠다. 만약 옆 손님이 대화하기 곤란한 분이면 어쩌지? 그렇다면 눈을 감고 잠이나 청해야겠다.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는 사이 출입구에서 노인 한 분이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오시는 게 아닌가? 저 어르신인가 보다. 자리를 살펴보며, 마음의 준비를 하긴 했지만 무언지 좀 허전(?)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천천히 오시던 어르신은 내 앞을 지나가셨다. 그 뒤에는 어린애를 뒤뚱뒤뚱 걸리며 젊은 여인 한 분이 들어섰다. 잠시 뒤 그 여인은 내 앞에서 좌석번호를 확인하는 게 아닌가.
"실례하겠어요. 여기가 제 좌석인 것 같아서요.”
"그래요? 앉으시지요."
여인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감탄하고 말았다. 그 여인은 얼굴이 하얗고 갸름하며,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30세 정도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데리고 온 아기는 2-3세정도로 만화 속의 공주 같은 귀여운 소녀였다. 그녀가 아기를 안고 앉기에 나는 자리를 좀 넓혀주었다. 나는 괜히 가슴이 설레면서, 가슴이 콱 막히는 충격(?)을 느꼈다. 여인과 아기를 떠올리면서 나도 모르게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해는 뉘엇뉘엇 서녘으로 기울어 가는데, 열차는 신나게 남쪽으로남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어떻게 말을 걸어볼까? 어떻게 말을 시작할까? 괜히 말을 붙였다가 실례가 되면 어쩌나?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옆 얼굴을 훔쳐 보았건만 그 여인은 모르는 체 애기만 얼리고 있었다.
긴 시간이 흘러간 듯했다. 아마 짧은 시간인데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아기 이야기부터 꺼내야지 하며 아기를 보고 있는 데, 인형 같은 공주가 쌩긋 웃는 것이 아닌가? 괜히 내 가슴은 마구 뛰었다.
“엄마가 미녀시라 아기가 꼭 동화나라의 공주님 같이 예쁘네요.”
“예, 고맙습니다.”
나는 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저 말없이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아기는 엄마 품에서 새록새록 잠이 들고, 여인이 먼저 음료수를 사서 나에게 건네주었다.
"잠시 아기 좀 살펴 주시겠어요? 화장실에.”
"예, 다녀 오세요.”
여인이 화장실에 다녀오는 동안에도 무슨 말을 먼저 꺼낼지 이 생각 저 생각을 했었다. 여인이 돌아오자, 하려고 햇던 말은 모두 사라져 버려서 또 말을 꺼낼 수 가 없었다.
“선생님은 무슨 일로 서울에 다녀오시는 길인가요?”
아이고 나는 또 한 방 맞았다. 또 먼저 말을 걸어오게 하다니.
“예, 학술 세미나가 있어서.”
“그렇군요. 어쩐지 학자 분 같아서.”
학자는 웬 놈의 학자, 겨우 초등학교 선생인데. 그러나 고맙긴 고마웠다.
또 얼마의 시간이 지났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말을 걸어야지.
“저, 실례지만 어디까지 가시는가요?”
“네, 대전까지 가는데요. 선생님은?”
“네, 저도 대전까지.”
사실 나는 대전보다 조금 더 가는데 엉겹결에 그렇게 말해 버렸다.
“잘 됐네요.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나 나누면서 가면 되겠네요.”
무슨 말을 주고 받았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쩐지 스스럼없이 대화가 이어졌고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제 남편이 출장이 잦아, 대전 유성온천에 놀러 오는 중이거든요.”
엉큼한 생각이 머리를 스쳐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기가 참 순하네요. 몇 살인가요?”
“네, 계집아이인데 올해 세 살이에요”
바르지 못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 그런지 할 이야기가 생각나지 않았다.
“아빠는 무얼 하시는 분인가요?”
“예, 건축업에 종사합니다.”
어찌나 시간이 빠른지 벌써 대전가까이 온 것 같다. 이제 이 여인과의 인연을 어떻게 마무리지으면 좋을까? 혼자 고심하는 사이 차는 플랫홈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들렸다. 그 여인과 같이 대전역을 빠져 나온 나는 어떻게 됐던 이 여인과 같이 유성온천까지 가기로 작정하고 택시에 동승하여 온천호텔에 도착했다.
여인은 커피 숖에 들러 차를 한 잔 마시고 아기를 맡긴 뒤, 먼저 프론트로 가서 무슨 말인지 손짓을 하더니 돌아와서,
“선생님, 투숙할 호실은 아직 정하지 않으셨지요? 저는 812호실인데요. 가급적 가까운 호실로 정하시면 좋겠네요.”
“아직 정하지 않았는데요, 이제 정해야지요.”
“이것도 인연인데, 오늘 여러 가지로 즐겁고 고마웠어요.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뭘요, 오히려 제가 고맙고 즐거웠어요.”
“잠시 뒤면, 제 남편이 이곳으로 오기로 했으니, 같이 한 잔 하면서 인사도 나누시고, 애기 아빠도 참 좋아 할 거예요. 인연을 엮어 보시죠.”
“아, 예? 그렇군요. 그럼 그렇게 하죠. 방을 정한 뒤 연락을 드릴게요.”
나는 그 아름다운 여인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그 여인이 812호실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허겁지겁 프론트로 가는 척하고 뒤통수를 만지며, 황급히 호텔을 빠져나와 더시 택시를 타고 아내가 기다리는 우리 집으로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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