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례 운조루(雲鳥樓) 공식 홈페이지 ▒

ㆍ작성자	오명순
ㆍ작성일	2008-12-05 (금)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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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와 박하사탕
할아버지와 박하사탕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반 오명순

벽시계의 초침 소리가 조용한 방안을 가득 채운다. 갑자기 소리가 너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때는 그 소리가 친구처럼 옆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오늘은 웬지 그 소리가 온 집안을 쓸쓸함으로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시계 옆의 액자 속에서는 손녀 가현이가 활짝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배를 따뜻한 방 바닥에 대고 엎드려 이번에는 쓸쓸하게 누워 있는 침대를 바라 보았다. 같이 동거하며 뒹굴던 침대를 외면하고 허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방바닥으로 이사를 했다. 참 따뜻하다. 어린 시절 아궁이에 불을 때서 절절 끓었던 그 온돌방에 비교할 수는 없지만 따뜻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항상 이불을 깔아 둔다. 외출에서 돌아 와 이불 속에 손을 넣으면 어릴 적 눈밭에서 꽁꽁 얼었던 손을 녹여 주시던 엄마 품속 같아서 참 좋다. 어린 시절 그 이불 속에는 항상 밥을 담은 두어 개의 밥그릇이 있었다. 무심코 손을 넣으면 뜨거운 스텐 밥그릇이 손에 닿곤 했었다. 그것은 식사 때에 같이 먹지 못한 가족 누군가를 위한 어머니의 사랑이었다.

어린 시절 내 고향집은 방이 미로처럼 복잡했다. 방문을 열면 또 방이 있고 문을 열고 계속 가다 보면 처음으로 돌아 나오는 그런 집이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숨바꼭질을 하며 즐겁게 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마루에서 첫 문을 열면 가장 먼저 시계가 눈에 들어오고 그 옆에 갓을 쓴 두루마기 차림의 할아버지 사진이 걸려 있었다. 왜 그 곳에 할아버지 사진을 걸어 두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아마 방에 들어가면서 할아버지에게 인사하고 들어가라고 그러지 않았나 추측해 본다. 첫 방의 문 높이는 다른 방 문보다 낮아서 허리를 숙여야 들어 갈 수 있었다.

안개가 자욱한 기억의 저편에서 누군가 나를 부른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기침소리가 들려 왔다. 못 들은 척하고 주위를 자꾸 서성거리지만 점점 또렷하게 들려오는 소리. 어린 꼬마는 그 기침소리가 싫었고 그 방안에서 나는 냄새가 싫었다. 마지못해 방문을 열고 가까이 가면 조막만한 손에 벌거벗은 박하사탕 하나가 쥐어졌다. 그 사탕에서는 할아버지의 기침냄새가 났다. 도망치듯 나와서 사탕을 입에 넣고 그 달콤한 유혹에 빠져들다 보면 어느새 할아버지의 기침냄새는 사라져 버렸다. 사탕에서 기침냄새가 날 리 없건만 왜 그 때는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손자 다섯을 보신 뒤 첫 손녀를 보셨을 때 꽃처럼 예뻤으리라. 할아버지는 가끔 나를 불러 박하사탕을 주시곤 했다. 그 박하사탕의 유혹에 빠져 어린 꼬마는 박하사탕이 먹고 싶으면 할아버지가 부르지 않아도 엄마 몰래 방문을 살그머니 열고 방안을 살피곤 했다. 방 한쪽 머리맡에는 요강이 놓여 있고 다른 쪽에는 사탕봉지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기침이 나오면 요강을 끌어다 침을 뱉고 박하사탕을 입에 넣으시고 내 손에도 쥐어 주셨다. 나만 누릴 수 있었던 할아버지의 지극한 손녀사랑이었다. 할아버지의 잔 심부름 끝에 주어지는 포상도 박하사탕이었다.

할아버지의 기침소리가 점점 잦아지고 어느 날 할아버지는 꽃상여를 타고 박하사탕과 함께 먼 길을 떠나셨다. 할아버지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이 슬펐는지 아니면 박하사탕을 먹을 수 없다는 것이 슬펐는지 참 많이 울었었다. 박하사탕은 그렇게 나에게서 떠났는데 언제부턴가 그 박하사탕은 다시 돌아 와 나의 식탁에 놓여 있다. 한약을 먹은 뒤에 박하사탕을 입에 넣고 할아버지를 생각한다. 한복을 입으시고 갓을 쓴 멋진 모습, 잎담배를 잘라 긴 담뱃대 끝에 꾹꾹 눌러 담아 피우시던 모습, 긴 수염이 신기해서 잡아당겼다가 “예끼 이놈” 하고 긴 담뱃대로 호통 치시며 웃으시던 모습, 박하사탕과 함께 떠나셨던 할아버지는 어린 꼬마가 자라서 시집갈 때까지 고향집 벽에 걸려 있었다.

할아버지는 왜 그렇게 박하사탕을 좋아하셨을까. 할아버지가 가장 힘들어 하셨던 것이 어쩌면 외로움이 아니었을까. 어두침침한 작은 방에 혼자 누워서 지내야 했던 쓸쓸함. 스러져 가는 육신의 옷을 걸쳐 입고 영혼은 우울증으로 시달렸지 않았을까. 달콤한 박하사탕을 입에 넣고 외로움을 달래셨고 깔깔거리며 뛰어다니는 손녀를 불러 사탕을 주며 기뻐하셨으리라. 철이 없어서 사탕만 받고 바짝 야윈 할아버지의 손은 한 번도 잡아 드리지 않은 것이 지금도 목에 가시처럼 걸린다. 그래서인지 요양원 어르신들을 만났을 때 서슴없이 손을 잡아 드리고 안아드릴 수 있었다. 아버지, 할아버지에게 잘해드리지 못한 죄책감이 커서였을 것이다.

다시 다람쥐시계의 초침소리가 들려왔다. 시끄럽다고, 건전지를 빼지 않고 야단치지 않은 것은 참 잘 한 일이었다. 시계 옆에는 할아버지가 아닌 활짝 웃고 있는 가현이가 있었다. 가현이의 눈과 마주치자 나도 환하게 웃어 주었다. 내가 할아버지 옆에 가기를 싫어하고 무서워했던 것처럼 가현이도 그럴까 두렵다.
푸르던 시절 열매 모두 내어 주고 노란 은행잎으로 아름다운 노년을 보낸 은행나무처럼 그렇게 곱게 늙어가리라. “가현아” 하고 두 팔을 벌리면 달려 와서 안길 수 있는 그런 할머니가 되고 싶다. 나의 할아버지가 박하사탕을 좋아하셨던 것처럼 나도 박하사탕을 좋아한다. 혹시 가현이가 커서 박하사탕을 왜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달콤한 박하사탕을 입에 물고 있으면 외롭지 않단다."라고 말해 주리라.
(2008. 11.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