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례 운조루(雲鳥樓) 공식 홈페이지 ▒

ㆍ작성자	김길남
ㆍ작성일	2008-11-20 (목) 06:09
ㆍ홈페이지	http://blog.daum.net/crane43

ㆍ추천: 0 ㆍ조회: 2562

나는 배가 고프다

나는 배가 고프다
전주안골노인복지회관 수필창작반,
전북대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야간반 김길남

나는 우체통이다. 나는 큰길가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에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빨간 옷을 입고 서 있다. 나도 옛날에는 먹을 것 걱정이 없었다. 원체 많은 사람이 나에게 먹을 것을 넣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나를 찾아오는 사람이 드물다. 늘 배가 고프다.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나면 신경이 곤두선다. 혹시나 먹을 것을 넣어주려나 싶어서다. 날씬한 몸매에 예쁜 옷을 입고 뾰족구두를 신은 아가씨도 또박또박 걸어오더니 그냥 지나간다. 두툼한 가방을 들고 바삐 걷던 아저씨도 지나가 버린다. 꼬부랑 할머니가 자박자박 걸어와 행여나 했더니 역시 마찬가지다. 실망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요즘은 전화가 집집마다 있고 또 사람마다 휴대폰까지 가지고 다닌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때그때 전화로 하니까 나를 찾을 필요가 없어졌다. 점점 내가 필요 없는 세상이 되는 것 같아 서글퍼진다.

그래도 나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다. 한꺼번에 많은 사람에게 알려야 할 일이 있을 때 나만큼 편리한 것도 없다. 동창회에 나오라고 회원들에게 알릴 때, 사당에 제사지낸다고 종원들에게 통지할 때 나는 중요한 임무를 맡는다. 회사의 상품을 선전하는데도, 사법고시에 합격했다고 알리는 데도 나는 단단히 한 몫을 한다. 그런데 뜻밖에도 사기꾼이 거짓말 통지문을 보낼 때는 속이 쓰리다.

나에게는 기쁜 소식과 안타까운 편지도 들어온다. 오래 기다리던 아들을 낳아 기쁘다는 소식을 예쁜 사진과 함께 할머니께 보내는 편지가 있었다. 그 할머니는 몸이 불편하여 귀여운 증손자를 보러 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편지를 받고 증조할머니는 얼마나 좋아할까. 또 도시에 나와 일자리를 잡고 열심히 근무하는 조카가 숙부님께 올리는 안부 서신도 있다. 아마 그 숙부는 전화도 없는 외딴 산골집에서 선산을 지키며 사는 것 같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편지 한 통이 커다란 기쁨을 주리라.

몇 년 전 일이다. 받을 사람 주소는 있는데 보내는 사람 주소가 없는 편지가 들어왔었다. 수상한 생각이 들어 살며시 들여다 보았다. 사업에 실패하고 살길이 막막하여 집을 나온 노숙자의 소식이었다. 2년이 가깝도록 소식 한 번 전하지 못하다가 어머니 제삿날이 되어 전하는 사연이었다. 그동안 돈벌이를 하여 당당히 집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어디 한 군데 밥벌이 할 데가 없어 길거리에서 자며 막일을 하다 보니 세월이 흘렀다는 것이다. 손에 쥔 것 없이 집으로 돌아 갈 수도 없고 식구들 보기도 미안하여 미루다 이렇게 되었다고 구구절절이 사죄뿐이었다. 기막힌 일이었다. 가만히 앉아 몇 억씩 받아 먹는 사람도 있는데 하루 몇 만 원 벌기도 어려우니…….

한 번은 이상한 편지가 들어왔다. 조그만 어린이가 천상의 엄마에게 보내는 소식이었다. 우표도 붙이지 않고 받을 사람 주소도 없었다. 그냥 ‘하늘에 계시는 엄마에게’였다. 하도 이상하여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돌아가신 엄마가 보고 싶어 눈물로 쓴 편지였다. 아빠 엄마와 세 식구가 살다가 엄마가 몹쓸 병에 걸려 먼저 세상을 떠나니 남은 어린이는 엄마가 보고 싶어 날마다 몰래 운다고 하였다. 말하고 싶어도 할 데가 없고,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는 서러움을 서리서리 써 내려갔다. 애절한 사연을 전할 데가 없어 하늘에라도 전하고 싶어 쓴 편지였다. 눈물이 저절로 나왔다. 천상에 전할 배달부를 찾고 싶었다.

가끔은 나를 해치는 사람도 있다. 발로 차기도 하고 뾰족한 것으로 긁기도 한다. 어쩌다가 편지가 아닌 쓰레기가 들어오는 때도 있고 물을 들어붓는 훼방꾼도 있다. 한 번은 불을 질러 큰 일 날 번한 때도 있었다. 이런 몹쓸 짓은 하지 않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여러 사람에게 귀여움을 받아야 할 내가 이런 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경제력이 세계 10위권에 든다는 우리나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옛날에는 아주 편리한 통신수단이었던 내가 지금은 이용하는 손님이 적지만 그래도 소중한 일을 한다. 전화로 이야기하거나 직접 말하기 어려운 일들은 편지로 써서 전하는 것이 편리하기 때문이다. 직접 대놓고 말하기가 딱한 사연을 전하는 데도 편지가 안성맞춤이다. 나는 때때로 이런 일을 하며 지낸다.

우리 고장에 즐거운 일이 많아 내가 지금보다 더 바빠졌으면 좋겠다.

( 2008. 11. 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