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례 운조루(雲鳥樓) 공식 홈페이지 ▒

ㆍ작성자	송병운
ㆍ작성일	2008-11-17 (월)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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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아, 보고 싶다
단풍아, 보고 싶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야간반 송병운

가을이면 어김없이 여기저기 단풍들이 예쁘게 피어나고 그것을 보려고 전국이 들썩거린다. 사실 단풍은 생명이 꺼져가는 백발 같은 마지막 몸부림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예쁘다고 구경을 다니고 사진도 찍으며 감탄하곤 한다. 우리 인간은 늙으면 보기 싫다고 외면당하는데 단풍은 사람보다 오히려 더 좋은 대접을 받는다.

매년 가을이 오면 예쁜 단풍에 대한 기대와 함께 가슴이 아려오는 슬픔을 겪곤 한다. 그것은 다가산의 단풍 때문이다. 한때는 시민들의 휴식처로 사랑을 받았지만 이제는 서서히 관심 밖으로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전주는 분명히 기품이 있고 아름다운 도시임에 틀림없으나 제대로 훨훨 날아보지는 못하였다. 늘 역사의 뒤안길에서 서러움을 받는 힘없는 도시로 지내왔다. 이러한 애환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느끼며 살아온 곳이 바로 다가산이 아닐까. 자식이 많은 늙은 부모처럼 긴 세월을 근심으로 엮어온 그런 산이 바로 다가산이다.

간혹 멋지게 우리나라 역사의 한 중심이 될 수 있었던 기회도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아쉬웠던 기회는 후백제시대가 아니었을까?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삼국을 통일하고자 야망을 불태우던 견훤대왕. 승암산의 험한 골짜기에 궁궐을 세우고 통일왕국을 건설하려고 밤잠을 설쳤으며, 때로는 어느 곳에 아름다운 궁궐을 지을까 고민도 했을 것이다. 혹시 다가산을 염두에 두지는 않았을까? 예쁜 단풍이 아른거리고 그 밑에는 전주천 맑은 물이 흐르고 있으니 맘에 쏙 들었을 것만 같다.
하지만 꿈을 이루기도 전에 사랑하는 큰아들 신검에게 금산사로 끌려갔으니 이를 어찌해야 좋을지. 권력이 무엇이기에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인륜도 버렸던 그 시절, 피눈물을 흘리며 용머리 고개로 끌려가는 견훤대왕을 바라보며 다가산은 가슴을 치며 울음을 터뜨렸으리라. 철사 줄로 꽁꽁 묶여 끌려가는 미아리 고개의 그 모습보다 더욱 처절한 용머리 고개는 아니었을지…….

어느 정도 상처가 아물 무렵 다시 한 번 가슴 벅찬 함성을 듣게 된다.
“왜놈들은 물러가라! 탐관오리들을 몰아내자!”
이렇게 외치며 용머리 고개로 넘어오는 동학교도들의 함성이다. 지지리도 가난해서 끼니를 못 잇고 부패한 관리들의 횡포에도 저항 한 번 제대로 못했는데 일본인들까지 들어와 우리 농민들의 재산을 강탈해가고 있었다. 국가가 백성을 보호해주지 못하니 스스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읍 고부에서 일어난 농민들의 함성은 전주로 넘어오며 전국을 휩쓸 태세였다. 다가산은 울었다. 이제는 우리 자식들이 사람답게 살아갈 날이 오겠구나 하고. 그러나 세상은 늘 약자의 편보다는 강자의 편에 서게 된다는 사실을 몰랐다. 관군과 왜군의 무력 앞에 힘없이 쓰러져 버린 영혼들의 꿈을 우리는 어떻게 위로해야 될지…….

‘내 복에 무슨 난리여!’라는 말이 있다. 세상살이가 너무 힘들어 난리라도 나서 너도 죽고 나도 죽어 버렸으면 좋겠는데 내가 복이 없다보니 그런 난리도 나지 않는다는 절망적인 푸념이다. 그런데 이 나라에 난리가 났다. 다름 아닌 일본의 식민지 지배였다. 35년간의 일본 식민지로서 아픔을 겪는 동안 다가산은 또 한 번의 버틸 수 없는 아픔을 겪고 만다. 일제는 조선을 영구히 지배하고자 소위 ‘황국 신민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 중의 하나가 신사참배이다. 전국 방방곡곡에 신사를 세웠는데 하필이면 이 다가산 정상에도 세워졌다. 전주의 심장에 처절한 아픔이 내려진 것이다. 참배를 위해 끌려오는 사람들을 다가산은 어떤 심정으로 맞아들였을까. 내가 이런 꼴 보자고 지금까지 살아왔나하고 통곡을 하지는 않았을까. 임종을 보려고 어머니 곁에 둘러 선 자손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애절함보다 더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다가산은 정말 전주의 모든 흥망성쇠를 다 보고 살아온 곳이다. 역사적인 큰 사건은 물론이고 우리들의 삶 모두를 바라보며 살아왔다. 우리 아이 울음소리도 듣고, 우리 집 개 짖는 소리도 들었다. 어제 옆집으로 이사 온 순이 모습도 다 보았다. 그러나 견디기 힘든 아픔 속에서도 언젠가는 하늘로 용솟음칠 영광의 날이 있을 거라며 그 날을 손꼽아 기다려 왔다. 한 때는 울분과 통곡으로나마 붉게 물들었던 단풍이 이제는 기다림에 지쳤는지 색깔도 곱지 않고 메말라간다. 그러나 전주가 멋진 도시로 발돋움 할 날이 오면 다가산 단풍은 덩실덩실 춤을 추며 곱고 고운 색깔로 새롭게 피어나리라.
다가산 단풍아! 어서 그 날이 보고 싶다!

(2008.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