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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박귀덕
ㆍ작성일	2009-08-21 (금)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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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
자존심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박귀덕

1985년 뜨겁게 이글거리던 태양이 서산 고갯마루로 넘어가고 있었다. 출장지에서 돌아온 직원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랐다. 곁으로 지나만 가도 짠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00읍사무소에서는 『소도읍 가꾸기』사업이 활발히 추진 중이었다.

농사만 짓던 주민들은 개발붐을 타고 땅값이 치솟자 벼락부자들이 많이 생겨났다. 갑자기 부자가 된 사람들은 볼일이 있어 읍사무소에 들어 올 때 직원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발로 문을 쓰윽 밀고 "읍장 어디 있어?" 하며 들어왔다. 읍장실 인터폰이 울렸다. "박여사, 여기 찻잔 치워."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다른 업무로 분주하기도 했지만 무척 자존심이 상했다. 세 아이의 엄마이고 남의 아내인데 2층 읍장실에 들어가 손님들 앞에서 찻잔을 치우라는 명령이었다.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못들은 척 그냥 말 수도 없었다. 총무계 자리를 쳐다보니 사환은 없고 C주사가 일을 하고 있었다.

"C주사, 읍장님이 찾으셔!" C주사를 읍장실로 올려 보냈다. 자존심을 접고 아무렇지 않은 듯 찻잔을 치울걸 그랬나?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다. "사환 거기 있으면 읍장실 찻잔을 치우도록 하세요." 그렇게 말을 해줬더라면 내가 올라가서 찻잔을 치우더라도 아무 거리낌없이 좋았을 것을…. 여직원의 입장을 조금도 배려하지 않은 읍장이라고, 교양이라고는 한 푼어치도 없는 상사라고, 직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지도자라고 탓해보기도 했었다. 아랫사람에게 함부로 했을 때, 본 때를 잘 보였다는 생각도 해봤다. 그래도 그때의 내 행동에 대한 변명은 되지 못했다. 여전히 마음은 편치 않았다. 눈을 딱 감고 찻잔을 치웠더라면 마음이 이렇게 불편하지는 않았을 텐데 후회도 되었다.

여름의 긴 하루가 저물 무렵 직원회의가 소집됐다. 읍장의 불쾌했던 감정이 여과 없이 쏟아졌다. 집안에서 살림만 하는 사람에게 누가 무엇을 시키겠느냐, 공무원이 되어서 상사가 시키는 것이 정 하기 싫으면 집으로 가라고 했다. 아무 표정 없이 그 말을 다 들었다. 고개도 숙이지 않고 태연히 앉아서,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부당한 명령이라며 항변도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은 가슴속에다 꼭꼭 묻어두었다. 여러 사람 앞에서 대들듯이 항변하지 않고 참는 것이 상사를 예우해 주는 방법이라 생각해서 참았다. 사과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사과하지 않고 태연히 않아 있었다. 차별받는 사람들은 언제나 마음이 여유롭지 못해 사과를 할 수 없다. 여직원이 찻잔을 치워야 한다는 편견이 바뀌는 세상을 꿈꾼다는 것이 요원하게만 느껴졌다. 사과를 하면 그 길이 더욱 멀어질 것 같아 마음에 빗장을 걸었다. 그날 자존심을 접고 찻잔을 치웠더라면 그날 하루만 마음이 불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상사의 생각이 내 생각과 다르다고 그 말을 무시해 버린 뒤 몇 날을 마음 상하며 살아야 했다. 지금 그 전화를 받게 된다면 웃으면서 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

읍장실에서 같이 차를 마신 땅 부자가 그 때의 상황을 전해 주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어이없어 입 밖으로 내 뱉은 말은 "허 참, 여직원에게 찻잔을 치우라고 했더니, 남자 직원을 올려 보냈네 그려. 거 참, 세상 말세여!" 하며 한탄했다고 한다. 내 자존심을 살린다고 상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것이다. 오종종한 얼굴에 황당한 표정을 짓는 모습이 그려진다. 읍장실에 손님이 오면 차를 만들어 어린사환에게 올려 보내는 일을 했다. 치우는 일도 그 애가 없으니 대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존심은 지켜야 했기에 총각직원에게 찻잔을 들고 나오도록 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닐지 몰라도 그 시대엔 그렇게라도 하는 것이 여성의 자존심이라고 생각했었다.

(2009. 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