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례 운조루(雲鳥樓) 공식 홈페이지 ▒

ㆍ작성자	정원정
ㆍ작성일	2009-08-16 (일) 09:00

ㆍ추천: 0 ㆍ조회: 3117

똑딱 똑딱 똑딱 똑딱
똑딱 똑딱 똑딱 똑딱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반 정원정

아파트에 살다보니 왜 이렇게 버릴 것이 많은지, 이사 오면서 시골에서 이미 버릴 것은 다 버린 줄 알았는데 아직도 남아 있었다. 오늘도 정리할 게 있어서 허두세비를 뒤지다 원고지에 적어 두었던 몇 줄의 글을 보게 되었다. 누가 글을 쓰라는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 보일 것도 아니면서 더러, 꿈에 떡 얻어먹기 식으로 끼적거려 놓은 것이다. 그땐 수필을 쓰리라고 생각도 못했고 수필집을 내리라고는 더더욱 꿈도 못 꾼 때다. 그저 막연히 쓰고 싶어서 썼을 뿐이다.

부드러운 목화솜

넓은 텃밭에 줄줄이 서 있는 감나무들의 잎잎이 햇발을 받아 윤기가 자르르하다. 연록색의 물감을 몸에 입기까지 겨울 설한풍도 견뎌낸 질긴 생명력에 머리가 절로 숙여진다. 들에도 길녘에도 사람 그림자 하나 없는, 바람까지 쉬고 있는 한낮이다. 파란 하늘엔 하얀 구름 몇 점이 마치 손으로 비벼 펴 놓은 목화솜처럼 가볍게 시부저기로 군데군데 붙어 있다.

내 어릴 적 어머니는 겨울이면 명주 아니면 무명 옷감에 쌀풀로 푸새를 먹여 얼추 말린 다음, 꿉꿉하다싶을 때 그것을 요리조리 접어 보자기에 싸서 고루 발로 밟으셨다. 주름이 대충 퍼지면 다듬잇돌 위에 놓고 여러 차례 비다듬으며 똑딱 똑딱 똑딱 똑딱……, 밤이 깊도록 다듬이질을 하셨다. 군불을 지펴도 늘 밍근하기만 한 방에서 어머니는 손이 시리면 간간이 가얇은 주먹손을 만들어 입가에 대고 호호 불며 다듬이질을 하시는 거였다. 춥고 출출한 것도 아랑곳없이 우리 삼남매는 잠들기까지 아랫목의 이불 속을 들고나며 들락거렸다. 이불이 펄럭일 때마다 남포등의 불꽃도 함께 나풀거리는 것이었다. 밖에서 된바람이 초가 마당을 소슬하게 스치는 밤이나, 더러 싸락눈이 사푼사푼 언 땅에 내려앉는 밤이면 다듬이소리는 소연하게 울려 퍼졌다.

여러 차례 비다듬으며 다듬이질을 하다보면 옷감은 물기 없는 함치르르한 태깔 좋은 바느질감으로 준비가 된다. 길속을 안 손바느질로 겉과 속을 붙여 맞춰 놓고 뒤집기 전 옷감에 솜을 입힌다. 그 솜은 새 것이 아니고 납작하게 다져진 이전 것을 다시 보송하게 손을 보자니 정성스럽고 지긋이 차분하게 손을 봐야 했다. 솜을 손으로 살살 비벼 펴면 새 솜처럼 들어 비치게 보송보송하게 된다. 가닥가닥 엷게 편 솜을 옷감에 입혀 조심스럽게 옷감을 뒤집으면 핫옷이 된다. 그 옷은 안찝이 명주일 땐 감촉이 어찌나 보드라운지 안옷을 입지 않아도 따뜻하기가 엄마 품인 듯 안온하다. 그 일을 어머니는 겨울이면 수없이 되풀이하셨다. 다섯 식구의 옷을 쉴 사이 없이 만드신 것이다. 더욱 아버지 옷은 공들여 만드느라 그 땐 우리들을 옆에 얼씬도 못하게 하셨다. 그렇게 수고롭게 매만진 옷을 차려 입은 아버지는 고동색 중절모에 작고 검은 가죽 가방을 들고, 흰 두루마기에 검정 가죽구두를 신고 단아한 모습으로 출타를 하셨다. 그 가방에는 여벌로 나들이옷 한 벌을 더 넣고 나가셨다. 여러 날 객지에 머물러 있을 채비를 하신 것이다.

내남없이 한복만 입던 시절에 어머니는 슬프도록 애잔하게 살다 가셨다. 저 하늘의 구름은 유유히 떠돌다 사라진 자국조차 남기지 않고 어디론가 가버리 듯 이제는 아무 곳에도 어머니의 흔적은 없고 훠이훠이 가신 정만 남겨 놓으셨다. 바람도 스쳐가고 세월도 스쳐 지나가고 인생도 가고 마는 것을……. (2000. 5. 11.)

여기까지 써 놓은 글을 휴지로 버리기에는 서운해서 골격은 그대로 두고 조금 다듬어서 정서를 했다. 어느 땐 앞뒷집에서 장단을 맞추듯 똑딱 똑딱 똑딱……, 시골의 고즈넉한 밤공기를 타고 퍼지던 다듬이소리를 지금은 들을 수가 없다. 아득한 그리움으로 가슴 어느 구석엔가 오롯이 남아 있을 뿐이다.

(2009. 8. 15.)

1. 푸새 _ 옷 따위에 풀을 먹이는 일.
2. 시부저기 _ 별로 힘들이지 않고 거의 저절로.
3. 비다듬으며 _ 매만져서 곱게 다듬다.
4. 꿉꿉하다 _ 조금 축축하다.
5. 된바람_ 매섭게 부는 바람.
6. 함치르르한 _ 윤이 반들반들 나는 모양.
7. 길속 _ 익숙해진 일의 속내.
8. 밍근하다. _ 약간 미지근하다. 9. 안찝 - 옷 안에 받치는 감. 안감.
10. 안옷__안에 입는 옷
11. 소연하다 _ 쓸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