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2학년 때, 선생님은 손톱검사를 자주 하셨다. 손톱이 너무 길면 야단을 맞았지만 특히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을 아주 싫어해서 더 혼내곤 하셨다. 그날도 불시에 손톱검사가 이루어졌다. 짝꿍이 안절부절 못해서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손톱빛깔이 주홍색이어서 그런다고 했다. 매니큐어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색깔이 진해서 혼이 날 것 같았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냥 그 아이를 지나쳤다. 짝꿍의 손톱은 ‘봉숭아 꽃물’을 들인 것이라서 벌 받는 대상에서 제외된 것이다. 당시, 난 왜 주홍빛 매니큐어는 혼나고 봉숭아 꽃물은 혼이 안 나는지 궁금했다.
지금도 친정집 골목을 지나가면 색색의 봉숭아꽃들이 피어 있다. 예전엔 경쟁하듯 꽃잎을 따곤 했었다. 그러나 지난해에도, 올해에도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저렇게 예쁘게 피어있는데도 무심하게 지나치는 내가 야속한 듯 바라보지만 뜯어봤자 꽃물을 들일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어렸을 땐 누가 더 물이 잘 들여졌는지 친구들과 비교하기도 하고, 손톱에 투명 매니큐어를 덧바르면 더 예뻐진다는 등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었었다. 그리고 여름날 저녁, 풀벌레 우는 소리를 들으며 엄마가 차례대로 꽃물을 들여 주던 생각이 난다. 그러나 요즘엔 봉숭아 꽃물을 손톱에 들이는 사람들이 없는 것 같다. 나조차도 왠지 촌스럽다고 느끼니 말이다. 요즘처럼 네일아트가 발달한 시대에 봉숭아물을 들인 내 손가락이 너무 촌색시 같아 보이지 않을까 싶다.
난 어렸을 때, ‘봉숭아’가 ‘복숭아’인 줄 알았다. 옆집 아이의 꽃물 들인 손이 어찌나 예쁘던지 뭐냐고 물었더니 혀가 좀 짧았던 그 아이는 ‘복숭아’라고 했다. 그래서 엄마에게 복숭아 물을 들여 달라고 했더니 한참 생각하시다가 아마‘ 봉숭아’일거라고 했다. 난 복숭아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으면 물이 들여진다고 생각했었다. 하여튼 난, 엄마를 졸라 봉숭아물을 들이기로 했다. 그러나 그땐 우리 동네에 그 꽃이 흔치 않아 아주 적은 양만 구할 수 있었고, 백반도 넣지 않았다. 그리고 엄마는 비닐 대신 까칠까칠한 호박잎으로 손가락을 감싸주지 않는가! 예쁜 꽃잎이 약간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도 좀 그렇고, 까칠까칠한 호박잎에 꽁꽁 묶인 손이 답답해 풀어버리고 싶은 유혹을 물리치고 예쁜 손톱을 위해 묶인 실이 빠질까 조심하며 잠이 들었다. 다음날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손가락엔 어떤 마법이 벌어졌을까 기대하면서. 그러나 심한 잠버릇 때문이었는지 손가락에 있던 호박잎이 다 떨어져 버렸다. 결과는 아주 연한 색만 들었을 뿐이어서 속이 상했다. 하지만 그 뒤에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완벽한 봉숭아 꽃물을 들일 수 있었다. 백반을 너무 많이 넣으면 손가락이 검어질 정도로 진하게 되고, 너무 연해도 안 되는 그 중간 비율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하여 친구들 사이에서도 꽤 자랑할 만한 손톱이 되었다. 또, 첫눈이 올 때까지 손톱의 봉숭아물이 없어지지 않으면 첫사랑이 찾아온다며 손톱도 깎지 않고 애지중지했던 기억도 있다. 그 어린아이가 첫사랑이 무엇인지 알진 못했겠지만 꽃물이 지워지지 않기를 기도했었다.
며칠 전, 친정 길목에서 봉숭아들이 날 바라보는 것 같아 조카 아인이에게 꽃물을 들여 줄까 해서 엄마와 함께 땄다. 작년엔 엄마가 봉숭아 꽃잎을 찧어 백반도 넣고, 호박잎이 아닌 비닐을 사용하여 예전에 딸들에게 했듯 손자들에게도 꽃물을 들여 주셨다. 조카들은 가렵다고 곧 풀어버렸지만 연한 빛도 예쁘다며 신기해했었다.
그러나 요즘엔 봉숭아꽃잎을 따고, 찧고, 감싸는 그런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조카가 문구점에서 ‘봉숭아 가루’를 사온 것이다. 가루를 사서 물에 개어 면봉으로 손톱에 바르고 기다리면 금세 봉숭아물이 들여진다. 힘들게 하룻밤 동안 손가락이 꽁꽁 묶이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너무 간단했고, 빠르고, 쉬웠다. 그러나 가족들이 오순도순 모여 봉숭아 꽃물을 들이던 그 즐거움은 느낄 수 없다.
오늘도 난 길목에서 봉숭아를 한참 바라보았다. 곧 꽃잎이 질 것이다. 예전 같으면 겨울이 되도록 지워지지 않게 소중히 누군가의 손톱에 흔적을 남겼을 텐데 그냥 지는 것이 아쉽다. 그래서 난 이번엔 손톱에 물을 들일까 생각중이다. 혹시나 손가락에서 비닐이 벗겨질세라 자다가도 일어나 살펴보던 기억, 손가락이 해방되는 순간 손톱엔 예쁜 빛깔이 들여져 탄성을 지르던 그 설렘의 시간을 다시 느껴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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