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례 운조루(雲鳥樓) 공식 홈페이지 ▒

ㆍ작성자	채선심
ㆍ작성일	2008-10-05 (일) 03:56
ㆍ홈페이지	http://blog.daum.net/crane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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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배 부른 가을인데
지금은 배 부른 가을인데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채선심

가을바람이 솔솔 불어오더니 들녘이 한층 더 고운 빛을 띄고 있다. 우리도 저처럼 아름다운 노후를 맞이할 수는 없을까? 자연이 현란한 색으로 물들 때마다 나는 늘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수확기를 맞은 들녘은 여기저기에서 벼가 쓰러져 눕는다. 텅 빈 논둑에 찬 이슬을 맞고 서 있는 허수네 아버지가 유독 처량해 보이는 가을 아침이다. 허수어미라도 같이 있다면 저토록 청승맞게 보이지는 않을텐데.

올해는 근래에 보기드문 대 풍작을 이루었다. 구릿빛 얼굴에 송알송알 맺힌 땀방울들이 풍요로운 가을을 일구었으리라. 빛 부신 가을하늘 아래 또 하나 물결치는 건 갖가지 축제마당이다. 전라남도 어느 지방에서는 허수아비축제도 열린다고 한다. 10월 한 달은 전국 곳곳에서 축제가 열려 온 국토가 몸살을 앓아야할 것 같다.

선비의 고장이요 열매의 고장인 내 고장 임실도 예외일 수는 없다. 해마다 10월이면 고추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진 관촌면 사선대에서 사선문화제(四仙文化祭)가 열린다. 구한말 의병활동을 한 28인을 배향하는 소충제와 구전설화로 전래되어 온 사선녀를 기리는 사선제가 열린다.

네 선녀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찾다가 이곳 관촌 오원천에 내려와서 멱을 감았다는 전설이 있었다. 그만큼 그곳은 경관이 빼어난 고장이다. 또 사선대 광장 안에는 조그만 호수가 있다.그런데 그 호수에 고인 물이 혼탁하여 볼썽사납다. 그러니 행사기간만이라도 물을 좀 깨끗이 해놓을 수는 없을까.

시화전이 열린다기에 마음먹고 사선대를 찾았다. 임실문인협회 회원들의 작품들인 듯한데 아는 분의 작품들도 보이고 K교수님의 작품도 전시되어 있었다. 나도 언제 저처럼 아름다운 시 한 편쯤 써보나 하는 부러움에 잠기기도 했다.

돌아오다 들른 봉천리 뒷산의 억새꽃은 바라만 봐도 마음이 순결해지는 것 같았다. 그 어느 선비가 이처럼 고결할 수 있을까? 넋을 잃고 있는데 어디선가 푸드득 하고 산꿩 가족이 한 폭의 한국화를 연출했다.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 행복한 산꿩 가족들을 방해했나 보다.

우리의 유행가 중에 "아~아 으악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란 가사의 '으악새'가 '억새'라는 것도 이 늦은 나이에야 알게 되었다. 일찌기 문학을 염두에 둔 사람으로서 부끄럽기 짝이 없다.

갈바람이 살랑살랑 맴도는 들국화 옆에 두 다리를 뻗고 앉아 마을들을 내려다 보았다.
비스듬히 지는 해를 등에 업고 아기자기하게 들어 앉은 마을들에서 훈훈한 사람의 냄새가 풍겨왔다.

높은 산에서 바라보니 봉천들녘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황금물결이 일렁이고 있었다.여름내내 땀을 흘린 농부들은 먹지않아도 배가 부를 것만 같다. 하지만 아직도 한 끼를 걱정하는 어린이 가장들이며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의 모습이 떠오를 땐 가슴이 시리다.

언젠가 영등포역 계단을 내려가다 너무 처절한 모습으로 계단 밑에 앉아있는 할머니가
눈에 띄었다.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왜 유독 그 할머니에게 시선이 꽂혔는지 나도 알 수가 없다. 몇 푼 되지도 않은 걸 건네 주었는데 자식뻘되는 사람에게 수없이 절을 하던 그 할머니가 오래도록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무슨 사연이 있을까? 딸이라도 있으면 저렇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텐데.

높은 산에서 내려다 보이는 광활한 들녘의 풍요만큼이나 올 겨울은 모든 사람들의 등과 배가 따뜻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다같이 희망찬 새 봄을 맞이하고 시원한 여름을 나며 풍요로운 가을을 맞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