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군 상관면 신리IC를 나간 중형버스는 전주-광양 간 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렸다. 문학기행을 십여 일 앞두고 두 살 위 누님이 작고하신 후유증이 있는 데다 참가 희망자가 적어 망설였는데, J총무의 ‘매년 해오던 전통이 있는데요!’라는 한마디에 힘을 받아 가까스로 열일곱 명이 가게 되었다. 예년의 참가자에 비하면 5~6명의 차이임에도 심적 부담이 컸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오히려 중형차의 오붓함과 올해도 거르지 않았다는 자부심이 위로가 되었다.
남해고속도로를 거쳐 하동군 북천면 소재 이병주문학관에 당도하니 해는 중천에 떠있고, 바람 한 점 없이 초여름 더위가 우리를 맞았다. 문학관 사무국장의 안내를 받아 이병주 소설가의 대표작, 장편소설 ‘지리산(智異山)’에서 ‘빨치산’이야기에서, 65년 전 초등학교 4학년 시절을 떠올리며 많은 생각을 했다. 그때, 많은 문우들이 편 액자 한 점 앞에서 웅성거렸다. ‘기불탁속(飢不啄粟)’이란 낯익은 글귀였다. 이병주 선생도 일생 좌우명으로 삼으신 듯싶다. 곰곰 생각해보니, 할아버지께서 생전에 머무시던 사랑채 마루방 벽에 걸렸던 자귀 가운데 일부였다.
“士別三日 刮目相對 鵬程萬里 飢不啄粟”
사별삼일 괄목상대 붕정만리 기불탁속
“선비가 책과 사흘을 떨어져 지냈다면 눈을 비비고 바라볼 정도로 정진해야 하고, 큰 새는 만리 먼 길을 날아가는 도중에 배가 고파도 조[粟] 같은 것은 쪼아 먹지 않는다.”는 뜻이다.
장자(莊子) 소요유 편에 나오는 글귀로서 ‘장부는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며, 큰길을 가는 데 불의에와 타협하지 말고 똑바로 가라’는 의미다.
내 어릴 적의 교훈이요 행동지침이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나는 엄격하신 조부님 슬하에서 자랐다. 첫째, 관직에 나갈 수 있도록 열심히 공부할 것을 당부하셨다. 또한 배가 고파도 밥 재촉은 절대 금했으며, 군것질은 물론이고 우는 소리도 못하게 하셨다. 둘째, 항상 행동거지를 똑바로 하고, 남 앞에서 당당할 것을 주문하셨다. 그래서인지 심신이 유약했어도 비겁하게 도망치거나 어려운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버티는 성격은 위 글귀를 통해 터득한 깨우침이다.
내 인생을 똑바로 잡아주신 분이 여러분 계시는데 중학교 1학년 때의 교감 선생님을 잊지 못한다. 도회지 B중학교 입학시험을 10여 일 앞두고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시험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도시로 나간 친구들에게 기(氣)가 죽고 속이 달아 날마다 개를 데리고 야산을 누비며 놀다가 시골중학교로 진학했다. 공부는 뒷전이고 산으로 쏘다니는데 만 정신이 팔리니 성적이 좋을 리 없었다. 어머니 역시도 큰일을 당하신 뒤끝이라 내 성적에 관심이 없으셨다. 그때, 어머니와 잘 알고 지내시던 조옥윤(曺玉潤) 교감 선생님이 우리 집에 찾아오셨다. 집안이 난리가 났음은 물론이다.
나와 초등학교 동기의 아버지도 되시기 때문에 내 처지와 성적을 소상히 알고 계셨다. 두세 달쯤이면 마음을 잡을 것으로 여겼는데, 갈수록 떨어져 찾아오셨다고 하셨다. 앞으로 얼마든지 도시로 나갈 수 있고, 명문고와 일류대학에 가려면 얼마나 공부를 잘해야 하는지 아느냐고 질책하셨다. 또한 에브라함 링컨 대통령이나 나폴레옹 황제도 어려운 환경을 투지와 끈질긴 노력으로 극복해 성공할 수 있었다며,‘기(氣) 죽지 말라!’고 무섭게 다그치시던 눈매를 평생 잊지 못한다.
이제 칠십대 중반을 넘기며 되돌아보니 회한(悔恨)이 많다. 할아버지나 조옥윤 선생님이 바랐던 만큼 노력도 하지 않았고, 기대한 만큼도 이루지 못했다. 나는 기질이 유약(柔弱)해서 쉽게 좌절하는 습성이 있고, 순리(順理)를 고집하다가 기회를 여러 차례 놓친 것이 무척 아쉽다. 하지만, 행동거지만큼은 할아버지 말씀대로 비굴했거나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이병주문학관을 찾아와 항상 마음 한구석에 자리해왔던 글귀‘기불탁속(飢不啄粟)’을 다시 한 번 음미해 본 행복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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