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배 소고
건배소고(乾杯小考)
행촌수필문학회 석인수
해마다 연말이 되면 망년회다 회식이다 해서 각종 모임자리가 많아진다. 사람마다 연초에 계획했던 일이 잘 됐던 못 됐던 연말을 맞는다.
아내의 59번째 생일이어서 형제들의 가족과 우리 가족이 함께 저녁식사를 하려고 비교적 깨끗하고 큼직한 대중음식점으로 갔다. 신축건물에 2층까지 있는 규모가 큰 식당이었다. 아내와 나는 예약 시간 전에 미리 도착해서 방에 앉아 있었다. 연말이라서 그런지 손님들로 꽉 차 북적이는 모습이 마치 장속 같았다. 식당 종업원들은 손님을 맞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고, 여기저기서 종업원을 부르는 소리, 대답하고 달려가는 모습, 방마다 연설하듯 큰 소리로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소리가 장난이 아니었다. 파안대소 ‧ 박장대소로 식당 안이 시끌벅적했다. 그러다 보니 반쯤 넋이 나가게 생겼고 밥이 콧구멍으로 들어가야 할 판이었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떠들어대는 우리의 모습이 정말 부끄러웠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더 유별난 것 같았다. 나라의 위상도 이만큼 되고 국민의 교육 수준도 이만큼 되었으면 이제는 달라져야 할 게 아닌가. 우리도 이제는 더 이상 무식을 드러내지 않을 때도 되지 않았을까 싶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가족들을 기다리고 앉아 있노라니 여기저기서 연출되는 진풍경들이 정말 가관이었다. 처음엔 정말로 깜짝 놀랐다. 떼를 지어 큰 소리로 무슨 구호를 외치는데 마치 시위나 쟁의(爭議)를 하는 것처럼 들렸다. 우렁차고(?) 힘찬(?) 소리가 온 식당 안으로 퍼졌다. 이른바 건배하는 소리였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방에 모인 참석자들이 돌아가면서 건배를 하는 건지 연신 구호 소리가 들렸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방에서도 행여 기라도 죽을까봐 더 목청을 높여 구호를 외쳐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식당 안이 온통 건배 천국이 되었고 그야말로 도떼기시장이 되었다. 그러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로 혼잡한데 서로가 질세라 모임마다 외장을 쳐대니 식당 분위기가 어쩌겠는가. 밥 먹는 것이 전쟁이고 식당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사람마다 건배 때문에 당황한 적도 있고 스트레스를 받은 경험이 한두 번쯤은 있을 것이다. 살면서 이런저런 인연으로 모임을 갖게 되고 자연스레 회식의 기회도 있게 된다. 그런 자리엔 으레 건배를 하게 된다. 마시는 것이 술이건 음료건 간에 잔에 따라 마실 때 의미 부여와 분위기 조성을 위하여 간단한 멘트(ment)와 제스쳐(gesture)를 하는 행위가 건배다. 이러한 건배는 대부분의 나라와 민족이 보편화되었고 건배 없는 연회나 회식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가정이나 직장에서도 건배를 하는 게 자연스런 일이 된지 오래다. 건배(乾杯)라는 말은 잔(杯)을 비운다(乾 )는 뜻이다. 원래 중국의 풍습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한다. 당나라 때는 식사가 끝난 뒤 자기 순서가 돌아오면 잔을 높이 들어 보이며 비워 마셨고, 송나라 때는 요리가 나올 때마다 술을 조그만 잔에 따라 마셨다고 한다. 건배도 나라와 시대에 따라 다르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에서는 술을 마실 때 잔에 담긴 술을 비우는 것이 예절인 것 같다. 중국 홍콩에서는 건배할 때 단번에 잔을 비워 마시고 잔을 거꾸로 해서 식탁위에 놓는다고 한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은 음미하듯 조금씩 나누어 마시는 것이 일반적이다.
건배 역사를 보면, 기원 전 3세기경 고대 로마시대 그리스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당시 그리스에서는 정적이나 라이벌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술에 독(毒)을 넣어 마시게 하는 행위가 만연했는데 그 때문에 술병에서 맨 처음 따른 첫 잔을 주인이 먼저 마셔서 손님들 앞에서 술의 안전함을 증명해 보인 다음 손님이 술을 마시게 했다고 한다. 따라서 당신에게 권하고 있는 이 술에는 독이 들어 있지 않으니 안심하고 드시라는 의미의 제스쳐였다. 그런 행위는 믿음을 갖게 하고 우정과 친목을 다지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 뒤 점점 발전하여 의미를 부여한 멘트와 함께 오늘날의 건배로 되었다.
건배 제의의 기원 역시 몇 가지가 전해지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옛날 그리스나 로마시대에는 식사 도중에 ‘신을 위해’, 공식 연회석상에서는 ‘동석자와 죽은 사람을 위하여’ 건배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또, 덴마크가 영국을 점령했을 때, 정복당한 영국 사람들은 덴마크 군인들의 허락 없이는 술을 마실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덴마크 사람들이 먼저 술잔을 들고 ‘건강을 위하여’라고 건배 제의를 할 때까지 술을 마시지 않고 기다렸다고 한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영국 사람들의 풍습에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건배를 영어로 토스트(toast)라고 하는데 엘리자베스 시대에 영국에서는 술잔에 토스트 빵을 넣어 마시는 풍습이 있었는데 흥이 나서 ‘토스트’하고 외치면 잔속에 가라앉은 토스트가 미끄러져 잔 밖으로 따라 내려오도록 잔을 기울여 술을 마셨다고 한다. 건배와 건배 제의의 기원이 어쨌든지 오늘날 행해지고 있는 건배의 행태가 과연 이대로 좋은 것인가 심각하게 생각해볼 때가 되었다고 본다.
건배와 건배 제의의 문화(문화라고 까지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는 나라마다 조금씩 다른 게 사실이다. 긍정적 측면에서 건배는 필요한 의식이라고 생각한다. 조촐하고 간단한 행사나 연회도 기쁘게 만들 수 있는 게 건배다. 특히, 비즈니스 상 주최하는 연회나 만찬에서 위트와 유머가 있는 적절한 멘트로 건배 제의를 하면 참석자의 기분을 더 좋게 하고 장내 분위기를 고조시켜 멋있고 수준 높은 행사로 만들 수 있다. 따라서 건배가 성공 비즈니스의 한 수단이고 방법이며 필수적인 절차일 수 있다. 그렇다면 건배를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 서양 사람들을 비롯해서 외국 사람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는 우리식으로 잔을 단숨에 비우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분위기상 잔을 비울 것을 권하고 싶을 때는 정중히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또한, 같은 우리나라 사람들끼리라고 해도 개개인의 성향이 다르고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도 있고 주량도 정도의 차이가 있으므로 막무가내로 잔을 비우라고 하는 것은 큰 결례라 생각된다. 우리의 음주 관습이 잔을 주고받으며 술을 권하는 것이어서 상대에게 억지로 잔을 비울 것을 강요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의 음주문화도 달라져야 한다. 좋은 사람들끼리 친목을 다지려고 갖는 연회나 회식이 언짢은 분위기가 되어서야 되겠는가. 반면에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이유로 건배에 참여하지 않는 것도 예의에 어긋난다. 건배를 반드시 와인 종류로만 하라는 법이 없다. 그러므로 모임에 참석한 이상 음료수 아니면 물이라도 잔에 채워 동참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최소한의 예의를 져버리는 꼴이 되고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게 된다. 또한 , 건배할 잔을 들 때는 자신의 눈높이 정도까지만 들어 올리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지 말고 자신이 있는 그 자리에서 참여자들과 눈을 맞추고 가벼운 목례나 눈길을 보내는 것이 좋다.
다음으로 건배제의는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 우리는 가끔 건배제의를 요청 받는 경우가 있다. 그때마다 무슨 말로 건배를 제의할 것인지 몹시 당황했던 때가 더러 있다. 직장생활을 오래 했거나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는 분들도 그런 경우 의외로 당혹스러워 하고 어색해 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아마도 그 이유는 어떻게 하는 것이 건배제의를 잘 하는 것인지가 정형화되어 있지 않고 원칙이 없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모임의 성격, 취지 또는 참석자와 관련된 희망과 발전, 행운을 주는 내용의 멘트를 하면 될 것이다. 건배제의는 원칙적으로 일어서서 해야 한다. 왜냐하면 참석자들로 하여금 주목하게 하고, 멘트에 귀를 기울이게 하여 좌중의 상황이나 반응을 살필 수 있으며 참석자에 대한 예의이기 때문이다.
연말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우리는 많은 모임을 갖는다. 그 때마다 건배가 식습관만큼이나 빠지지 않는다. 얼마나 만연되었으면 난지 2년 갓 넘은 우리 손녀도 물 마실 때마다 건배를 하자고 한다. 나의 일상이 곧 다른 사람의 일상이나 마찬가지다. 나의 일상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의 일상이 침해 되어서는 안 된다. 건배로 인하여 받는 스트레스를 생각해 보았는가. 자신들만의 공간이 아닌 대중음식점에서 있는 힘을 다하여 목청껏 큰 소리로 구호를 외치며 떠들어대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시위대가 외치는 구호 소리 같은 건배제의는
즐거운 회식 자리에서 하는 건배일 수 없을 것 같다.
< 2009. 12.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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