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여름, 무기력해진 장마 끝자락을 부여잡고 해바라기도 시름에 겨워하던 날, 나는 엉거주춤한 행색으로 ‘솔섬’ 앞에 섰다.
‘서해 낙조’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솔섬’이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는데, 처음으로 오늘 이렇게 상면하게 된 것이다. 인근의 다른 섬에 비하면 그 몸집이 면봉만도 못하다는 무인도, 고염(固鹽)이 되어버린 석회암 가득 소나무를 이고 있는 섬, 그러나 그는 어떤 섬보다도 세인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는 이야기꾼으로 알려졌다. ‘한 치 혀 크기만도 못한 섬이 뭇 사람들과 끊임없는 소통을 하다니…….’
전북문인협회가 이곳에서 ‘문예캠프’를 열었다. 태동이후 처음 치르는 잔치라는데 여기에 상을 차린 데는 뜻이 있었으리라.
버스에서 내리는 문사들의 모습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옛날 중원의 칼잡이들을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차림새는 평이하였으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하나 같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저 품새는 내공하고 비례하는 거야.”
곧 주막집에서 나와 만나게 될 텐데, 가슴이 뛰었다.
행사장인 ‘부안학생해양수련원’ 측은 현관에다가 솔섬이 연출하는 용 내림 상과 낙조 구름 상을 내걸어 찬미하고 있었는데, 이날의 솔섬은 그 유명세에 걸맞은 면모를 드러내지 못해 미안한지 어깨가 축 늘어져 있었다. ‘흐린 날씨 때문에 낙조랑 한 덩어리가 되지 못했구나, 연분홍으로 채색된 수평선에 소나무 그림을 수놓아야 하는 건데…….’
아쉬움이 조바심으로 변해가는 시각, 내 마음은 아랑곳없이 섬 주변은 태양의 흔적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태양을 먹은 새’가 이미 날아가 버린 것이다. 기대했던 낙조를 보지 못한 아쉬움이 못내 컸다.
‘낙조’ 와 ‘황혼’을 그것도 풀코스로 음미하고자 하였던 내 마음에는 상처가 나고 말았다.
Hot Age(은퇴 후 의미 있는 여생을 보내기 위하여 사전에 새로운 지평을 모색하는 시도로 쓰임)를 꿈꾸는 나에게 황혼이 주는 의미는 특별하고 또 다양하다. 마치 지금 내 눈 앞에서 변화무쌍한 모습을 연출하는 ‘솔섬’처럼 말이다.
꿈속의 Hot Age는 나에게 언제고 향기 나는 세상을 만들라고 주문해왔다. 전향적인 행보는 물론 화려한 콘텐츠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지천명의 꿈이다. 그것은 30, 40년을 이어갈 컨셉이어야 하는데, 공교롭게도 그 실체 주변은 스모그와도 같은 기운이 창궐하며 아지랑이처럼 스멀대고 있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오늘의 낙조상은 이런 나를 변주(變奏)하고 있는 것인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문예캠프의 수업은 빈틈없이 진행되었다. 어떤 선생님은 소설을 잔소리와도 같다고 하셨다. 다른 선생님은 시작(詩作)의 자세로 반복적인 실사(實寫)를 들었다. 여러 선생님들의 한결같은 주문은 다독과 습작이었다. 내가 만들어 가야할 New Age에 많은 시사점을 남기는 주옥같은 주문이 알알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산책시간에 다시 ‘솔섬’ 앞에 섰다. 3년 전에 다녀온 ‘레만호’ 생각이 났다. 이승만 대통령이 프란체스카 여사를 만났다는 그 레만호…….
암울하던 시절, 머나먼 이국의 호숫가를 배회하던 청년 이승만과 나이 50을 숨 가쁘게 넘기며 가슴조이는 나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빙하수와 짠물, 청년과 중년, 나라의 큰사람과 일개 소시민인 나, 그런 상식선의 비교 말고 말이다. ‘하섬’은 말이 없고 섬 너머로 초등학생 목도리 색깔을 닮은 구름들만 깔깔거리고 있었다.
눈부신 날들에 대한 기대, 설렘, 여망을 두고 여기 하늘과 잇닿은 ‘솔섬’ 앞에서 다가올 글에게 다짐한다.
‘별을 품으리라!’
‘커다란 성운(星雲)이 되어 찬란한 황혼을 거두리라’
‘훗날 여기 와서 저 거룩한 태양의 담금질을 보며 오늘을 기리리라’
이런 나의 정열을 Hot Age에 대한 소망으로 타임캡슐에 담아 여기 ‘솔섬‘에 묻고자 한다. 섬 뒤로 그림자가 밀려오는 시각, 초발심의 발화가 감지된다. 나의 Hot Age 세계가 보이는 듯했다.
아, 아~ 살 것 같다. 오늘 행사를 마련한 ‘전북문인협회’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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